양당제도가 굳건히 자리잡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민주 양당 후보 중 어느 한쪽이 70%를 넘는 몰표를 받기는 여간 쉽지 않다. 공화당이나 민주당 깃발을 단 이상 아무리 못해도 40% 정도는 얻고 아무리 잘해도 상대방에게 40% 정도는 내주게 돼 있다. 그러므로 미 대선은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움쩍하지 않는 붙박이 공화당표와 굳은자 민주당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은 20% 안팎으로 추정되는 부동표에 의해 결판이 나게 마련이다. 지난 수십년간의 미 대선에서 거듭 확인된 경험칙이다.
콕 찍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번 제44대 대선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주별로 선거인단 쟁탈전 판도를 보면 곳에 따라 득표율의 등락은 있었지만 부시 대통령은 ‘보나마나 공화당’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 ‘예정된 승리’를 거뒀고, 케리 후보 역시 ‘안봐도 민주당’ 영역으로 소문난 곳에서 ‘따놓은 승리’를 챙겼다. 승패를 가른 곳은 오하이오주·플로리다주 등 그동안 어느 한쪽에 확실하게 줄을 서지 않았던 몇몇 접전주들에서 갈렸다.
그렇다면 이들 접전주들, 즉 부동표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 유권자들의 표심을 결정지은 요인은 무엇인가. 전시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전통, 부시 진영의 적확한 선거전략, 상대의 실책을 자신의 점수로 연결시키지 못한 케리측의 전략부재 등 여러가지 이유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9·11 테러참사의 배후조종자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의 영향이다.
부시 타도를 외치는 빈라덴의 녹화테이프가 지난달 29일 미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부시의 재선을 도왔다는 것이다. 즉,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라크전 자체에 대해서는 미 유권자들이 갑론을박을 계속하고 있지만 빈 라덴에 대해서만은 당파를 초월해 치를 떨고 있는 마당에 그가 부시를 타도해야 한다고 소리쳤으니, 부시가 좋지는 않지만 빈 라덴은 미워서라도 부시를 찍겠다고 마음을 먹은 유권자들이 적지 않으리란 풀이다. 그의 등장이 몇표를 움직였는지는 알 수 없다. 특히 ‘미우나 고우나 00당’으로 굳어버린 몇몇 주에서는 빈 라덴이 무슨 쇼를 벌이더라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차이로 승패가 엇갈린 접전주에서는 분명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게 틀림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일부 냉소적인 선거전문가들은 부시의 최대참모는 다름아닌 빈 라덴이었다는 말까지 내놓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의 주요 선거 역사를 봐도 이는 어느정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선거 때만 되면 되풀이됐던 ‘북풍’의 교훈이 생생한 터라 그 주장은 더욱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집권여당 김영삼 후보와 제1야당 김대중 후보가 한달앞 대선 승리를 위해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1992년 11월,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해방 이후 최대 간첩단 사건이라고 폭로(?)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으로 하마터면 잊혀질 뻔한 ‘김대중=빨갱이’ 망령이 되살아나 선거판도를 갈라놓았고, 그보다 5년 전 1987년 대선을 앞두고는 북한공작원에 의한 KAL 공중폭파 사건이 발생해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 아닌가.
김대중이 4수끝에 대권고지 점령에 성공한 97년 대선에서도 북풍의 망령의 여지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해 8월 오익제 천도교 교령이 월북해 잘나가던 김 후보 진영에 찬물을 끼얹더니 10월 부부 간첩단 사건, 11월 김병식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의 가짜편지 사건 등 ‘김대중=빨갱이’ 공식을 상기시키는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심지어 선거 직전에는 궁지에 몰린 특정후보측이 북한측에 휴전선에서 제한적 무력충돌을 일으켜달라고 요구했다는 ‘총풍’ 의혹까지 불거졌다. 총풍은 미완으로 끝났지만 96년 총선을 앞두고 인민군이 휴전선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시위를 벌임으로써 당시 집권여당 신한국당의 승리에 기여한 전례에 비춰 실행에 옮겨졌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지 누가 알 것인가. 어쨌든 그해 선거는 세인들이 ‘김대중=빨갱이’ 세뇌에서 어느정도 풀려난 덕분이든, 이솝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더이상 양치기의 말을 믿지 않기로 작심한 덕분이든, 김대중의 승리로 마감됐다.
굳이 한국의 어두운 ‘북풍사’를 들추지 않더라고 만일 빈 라덴이 진정으로 부시의 낙선을 바랐다면 공연히 이 중차대한 시기에 얼쩡거리며 부시에게 삿대질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지적은 제법 설득력있게 들린다. 더욱이 한국선거사의 북풍과 달리 이번 미 대선의 빈라덴풍은 처음 분 바람이어서 유권자들이 또 그거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이유도 없었다. 빈틈없는 빈 라덴이 그걸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미국, 즉 부시와의 투쟁을 통해 자신을 이슬람세계의 성스러운 존재로 키워온 이 상태를 즐기자는 것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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