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본격적으로 한국말을 공부한지 벌써 2년이 됐습니다.
현재 한국어에 푹 빠진 상태이지만 외국어와 사랑에 빠진 기간으로만 따지면 저는 영어와의 관계가 훨씬 오래됐습니다. 저의 영어학습은 일본 중학교에서부터 의무교육으로 공부하기 시작해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계속 됐습니다.
하와이에 산지 5년이 지나고 대학교에서 공부하다 보니 영어가 아직은 한국말보다 쓰기나 읽기나 전반적으로 낫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영어는 한 시간정도만 말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데 한국말을 할 때는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어학적으로 한국어는 저의 모국어인 일본어와 가깝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단순한 이유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저의 아이덴티티와 깊은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 아이덴티티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근거를 국적이나 민족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국적이나 민족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뭔가 확고하고 실질적인 인상을 받겠지만 실제로는 국적이나 민족이란 것은 이름표 같은 것이고 그 안을 채우는 문화가 없으면 빈 상자와 같은 것일겁니다.
한국처럼 문화의 다양성이 별로 없는 나라에서는 아이덴티티의 갈등도 많이 없을 것이지만 미국같이 문화와 민족이 다양한 나라에서는 아이덴티티의 갈등이 개인의 차원에서만 아니라 국가차원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미동포 2세같은 경우 민족은 한국인데 국적은 미국이란 이중성을 가지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한국에서 자랐던 부모님과는 달리 미국과 한국이란 두 나라의 문화에 노출되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두 문화가 자신의 일부가 됨으로써 갈등도 생길 수 있고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할려고 할 때 적지 않은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재일동포의 경우는 어떨가요? 재미동포의 경우에 비해 한국과 일본은 문화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아이덴티티의 갈등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재일동포한테는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더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일본도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지만 한국처럼 국적과 민족을 동일하게 하나의 범주로 생각합니다. 즉 국적과 민족을 하나로 인식하고 거기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미국과 크게 다른 점입니다. 미국에서는 민족과 국적은 당연히 다른 범주 입니다. 재미동포 2세는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국사람이라는 민족성은 잃어버릴 수 없고 외모를 통해서도 항상 한국인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는 아이덴티티는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논의되어 온 문제 입니다.
그것에 비해 일본사회에서 살고 있는 재일동포의 경우에는 국적과 민족을 동일시하는 일본의 토양과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의 신체적인 유사성때문에 민족성 유지가 훨씬 어려워 집니다.
많은 동포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앞으로도 계속 일본에서 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귀화를 하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한국 국적만이 자기 민족성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벌써 3세, 4세, 5세가 되는 재일동포의 대부분은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거기에다 일본과 한국간에 있었던 불행한 역사 때문에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문화적으로 일본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인정하는 것에 대해 자신을 속이는 것 같고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른들의 말대로 한국사람이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려고 해도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이 말만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재일동포의 경우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논의될 기회도 별로 없는 채 개인의 마음 깊은 곳에 들어가 불연소한 상태로 내재화되고 심리적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아이덴티티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왔습니다, 지금 한국말을 공부하면서 뭔가 저의 몸안에 있는 비어 있었던 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문화는 언어ㆍ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언어는 문화와 사회를 비춰 주는 거울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문화와 사회를 배우는 것입니다.
재일동포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은 다른 외국어를 배울때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 같은 기쁨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도대체 일본사람인가? 아니면 한국사람인가? 그런 이름표를 따지는 질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적 공허감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을까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느낄 수 있는 충족감 때문에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재일동포가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비어 있었던 자신의 한 부분을 채워가는 과정이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또 다른 자기 자신과의 만남일지도 모릅니다.
박육미
하와이대학교
한국어석사과정
플래그십 프로그램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