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주홍글씨’로 진가 재확인
오는 29일 개봉하는 ‘주홍글씨’는 한석규라는 배우의 가치를 새삼 확인시켜주는 영화다. 함께 연기한 이은주의 파격적인 연기도 화제이지만, 이 영화의 기본적인 존재가치는 한석규에게서 나온다. 한동안 잊혀졌전 이름 한석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함께 해온 그의 축적된 에너지가 약간의 속도 조절을 거쳐 아주 알맞게 폭발했다. 뜨거운 태양을 맛본 후 한동안 어두운 지하에서 묵묵히 숙성된 와인의 맛. 스크린이 한석규라는 진한 레드 와인으로 물든다.
마침 ‘주홍글씨’는 그의 영화인생 10년을 기념하는 10번째 영화. 이래저래 한석규를 돌아보게 된다. 그의 부활은 한국 영화계를 한층 풍성하게 하는 반가운 소식이다.
▲한석규, 파우스트로 돌아오다
한석규는 ‘주홍글씨’에서 파우스트가 된다.
그는 능력있고 자신있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차갑다. 결정적으로 나약하다. 주인공 기훈의 세련된 외투를 벗기면 그 안에는 불안과 비겁이 숨어 있다. 기훈은 즉물적이고 탐욕적이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구순기’를 벗어나지 못한, 현실 도피적이고 의지박약인 인물. 배우로서 욕심나는 캐릭터.
한석규는 이렇듯 복합적인 캐릭터를 기다렸다는 듯 완숙하게 소화해냈다. 특유의 백지 같은 무덤덤한 얼굴에 농도 짙은 유화를 그리며 섬세한 붓터치를 했다. 무색무미의 얼굴은 그래서 더 섬뜩하다. 새삼 한석규의 진가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기분 나쁜 자신감이 줄줄 흐르는 능글맞은 표정에서 애욕에 사로잡힌 표정, 한없이 비겁하고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까지 그는 묵혀뒀던 에너지를 분출하듯 연기했다.
마침 이는 현대인의 표정이다. 덕분에 그는 ‘이중간첩’으로 전해준 ‘고상한’ 괴리감을 보기좋게 떨쳐냈다. 그렇다. 한석규만큼 도회적인 이미지가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었던가. 더불어 친근하고.
▲지존, 동면을 끝냈는가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2000년대 들어 한국 영화계의 대들보로 거론되는 이들이다. 특히나 신세대에게 이들은 한국 영화계의 지존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한석규가 자리하고 있다. 한석규는 1994년 ‘닥터봉’으로 스크린에 인사를 한 후 1998년까지 만 5년 간 여섯 작품을 성공(흥행이든 평가든)시키며 한국 영화계의 지존으로 군림했다. 그 없이 한국 영화를 논할 수 없었고, 그 외에는 남자 배우가 없는 듯했다. 실제로 다른 배우들은 그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으며, 후배 배우들은 한석규 선배님을 닮고 싶다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특히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영화팬들이 꼽는 명작 반열에 반드시 거론된다. 한석규는 ‘넘버3’도 되고 ‘쉬리’도 되고 ‘8월의 크리스마스’도 되는, 한국 남자 배우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1999년 11월에 개봉한 ‘텔미썸딩’을 기점으로 슬럼프에 빠진다. 한석규, 심은하라는 최상의 조합이었음에도 영화는 상대적으로 신통치 못한 성적을 거뒀고, 이미 몸집이 커질대로 커진 한석규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체중조절이 필요했?
광속의 시대. 이후 그가 지난 몇년 간 침묵하는 사이 신세대들에게 한석규는 이동통신, 평면 TV의 CF 모델로 익숙할 뿐 앞서 거론한 배우들과 같은 레벨에 들지 못했다. 3년의 공백을 깨고 그가 2002년 ‘이중간첩’을 선보일 때 언론은 대대적으로 집중조명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관객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설상가상으로 작품성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서 이제 그는 재기불능 선고를 기다리는 듯했다. 특유의 ‘조용한’ 성격 역시 큰 몫을 했다.
▲한석규, 부활하는가
스스로도 큰 산을 올라온 느낌이다. 이제 또다른 등정을 시작할 때라고 정리하는 그에게서는 슬럼프를 털어낸 듯한 개운한 여유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예전의 인기나 지위로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
심하게 감기를 앓고 난 후 서서히 얼굴빛이 돌아오고 있는 그는 올해 불혹이다. 이제는 어떤 것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제는 내가 최고가 아니기 때문에 최고에 대한 부담은 없다는 말로 개런티나 그 외 그가 가질 수 있는 ‘권력’에 대해 어느 정도 마음을 비웠다는 인상을 준 한석규.
그러나 ‘여전히 장사가 되는 배우’가 될지는 29일 판가름난다. 젊은관객 층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뭇 궁금하다. 조건은 갖춰졌다.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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