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논설위원)
가을이 오면서 여기 저기 만발한 국화꽃에서 향기가 진동한다. 가는 곳마다 보이는 국화꽃을 보면 그 생김생김에 따라 풍기는 냄새가 제각각 다르다. 국화꽃은 눈에 틔게 피어나는 봄철의 꽃과 같이 겉모습이 요염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지만 수수한 색깔로 은은하게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격조 있는 꽃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사회에도 국화꽃과 같은 향기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나 하나의 희생과 봉사, 땀흘림이 어려운 사람이나 주위에 힘든 사람을 도와주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는 분명 가을의 국화꽃 같은 향기를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사 속에도 이런 인물들이 많이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사람으로 일제하에서 독립을 위해 애쓴 많은 독립운동가들, 한국의 민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함석헌씨 같은 인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민교육을 위해 애쓰며 살다 숨진 안창호씨 같은 인물, 그리고 핍박 속에서도 한글과 문화, 예술을 잘 지켜낸 한국의 위인들, 이들
은 모두 이 가을에 생각나게 하는 국화꽃과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뿌린 향기는 두고두고 남아 세월이 흘러도 지금까지 우리들의 가슴에 은은하게 스며 있다.
현존하는 인물 중에도 대표적인 사람으로 휠체어에 탄 몸이지만 새로운 것을 향해 쉬지 않고 의지를 불태우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 같은 인물들은 다 이 가을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인물이다.
그들은 모두 토종 한국인으로서 얼과 정신을 잃지 않고 대의를 향해 삶을 살았다는 점이 아름답고 본받을 만하다. 그래서 한 사람의 생애, 역사, 그
리고 살아온 내력을 느끼게 하는 가을만 되면 유독 이들이 더 떠올려지는 것이 아닌가.
이들처럼 역사에 남아 향기를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이름 없이 들꽃같이 소리 없이 남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들도 많다. 이들에게서 우리는 가을의 국화꽃 같은 향기를 느낀다. 이들의 향기는 널리 퍼져 사람들의 마음을 온화하고 따뜻하게 만들면서 가정과 사회를 밝고 맑게 그리고 아름답고 힘차게 변화시킨다.
저변 깊숙히 향기가 뿌리를 내리면서 가정과 사회가 정화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소풍 중’이라는 제하의 수기를 쓴 황교진씨는 전신마비로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자식사랑을 고백했다.
식물인간의 어머니를 7년간 곁에서 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주고 돌아 눕히고 하는 그런 힘겨운 일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눈물겨운 사랑과 정성으로 어머니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병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이는 정말 혼탁한 이 사회에서 맡기 힘든 국화꽃 같은 향기가 아닐 수 없다.
한인사회에도 지난해 작고한 봉사센터의 박인규 옹이 살다간 모습도 알고 보면 국화꽃과 같은 아름다운 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84세로 숨지기 한해 전까지 한인노인들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11년간 시민권영어와 통역 등으로 봉사센터에서 열심히 봉사하다 병환이 나 수술을 받고 몇 개월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봉사센터에서도 그는 의지가강하고 올곧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버스를 타면서 시 노인국 소속 봉사직원으로 교통비로 지급되는 최소한의 봉사료로 체력이 다하는 날까지 노인들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노인아파트에 혼자 살면서도 푸드 스탬프를 절대 신청하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영어강좌 외에 한인사회 발전과 정화를 위해 우선 노인들부터 미국을 배우고 변화해야 한다며 미국역사, 미국에서 살아가는 법, 매너 등을 노인들을 상대로 강좌를 해오다 건강이 나빠져 그만두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자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몇 해 전부터 자신의 장례비와 장지마련을 위해 수중의 적은 돈에서 조금씩 떼어 장의사에 저축했으며 봉사센터 장(葬)으로 치르겠다는 주문도 완곡하게 거절, 그의 간청에 의해 가족 장으로 조용히 장례식이 치러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향기가 물씬 나는, 그래서 주위를 밝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한인사회에는 이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많은 봉사자들이 있다. 그리고 숨은 선행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올 가을은 이런 사람들의 향기 속에 몸을 돌려 흠뻑 취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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