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선<본보편집위원>
미국인들은 좋은 대통령의 추억을 많이 가지고 산다. 그들은 죽어서도 산 사람들과 함께 꿈과 희망을 호흡한다. 존경하는 대통령을 추억하는 미국 국민들은 그래서 행복하다.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축제분위기에서 치러질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그런 좋은 추억에서 비롯된다.
좋은 대통령을 원하는 기대는 한국사람들도 미국사람 못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사람들에겐 불행하게도 그런 좋은 ‘대통령의 추억’이 없다.
이승만 이후 모두 8명(현 대통령 제외) 대통령이 한국의 근대사에 점철됐다. 이 중 한 두 명쯤은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아 있을 법도 하건만, 현실은 너무 박복하다.
초대 이승만은 남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출범시킨 중요한 역할을 하고서도, 부정부패와 장기집권의 고리를 끊지 못해 강제로 자리를 내놔야 했다.
박정희는 어떤가. 군사독재와 장기집권의 ‘그늘’은 못살던 나라를 근대화시킨 큰 업적마저 어둡게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어둠은 전두환과 노태우라는 대통령을 낳았고, 그들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10년 이상 후퇴해야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없었어야 했던 대통령들이었다. 그들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 군사독재정권의 목숨을 총칼로 10여년을 부지시킨 군인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이 집권한 10여년의 세월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해도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시간이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문민 대통령들도 좋은 추억을 남기지 못한 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김영삼이 문민시대의 문을 열었고, 김대중이 그 뒤를 이었지만 계속된 실정으로 결국에는 두 사람 다 빛을 잃었다.
그들은 한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정치인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군사독재의 잔재를 걷어내고 새로운 민주질서를 정착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군사정권과 싸워 살아남은 일로 한 평생을 보내다 보니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정치를 개혁시키지도, 부정부패를 근절시키지도 못했다. 경제는 외국자본들이 점령해버렸고, 돈이면 뭐든 된다는 저질 자본주의는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은 선진국으로 가는 문턱에서 주저앉고 만 형국이다.
어떻게 대통령이 됐던 그들 중 한사람이라도 진정 사심을 버리고 제대로 나라를 이끌었다면 지금의 나라 사정은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대했던 그런 영웅은 없었다. 그들은 권력 지향적인 사람들일 뿐이었다. ‘대통령’ 자리를 옛날 ‘임금님’ 자리쯤으로 인식했고, 그것을 차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는 예외 없이 자기만족에 겨워 본분을 잊고 자기 중심적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한국사람들의 대통령에 대한 추억이 이처럼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런 대통령들을 욕한다. 그들이 그런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인과응보다.
그러나 진짜로 반성을 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그것은 그런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이다.
대통령은 세습되는 자리가 아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좋은 대통령이든, 나쁜 대통령이든 그들이 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 그들을 뽑아주는 것은 국민이다.
똑똑한 국민만이 좋은 대통령을 만든다. 두 눈 부릅뜨고 좋은 자질과 능력을 갖춘 후보를 식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유혹과 강요가 있어도 그런 후보에게 표를 줄 수 있는 정의로움을 보여야 하다. 그런 국민만이 훌륭한 대통령을 가질 자격이 있다. 설사 현란한 ‘대통령 만들기’에 속아 잘못 뽑은 지도자라 할지라도 국민이 똑똑하면 헛된 마음을 먹지 못한다.
말로는 좋은 대통령을 찾으면서 표를 찍을 때는 지연, 학연, 혈연 등 개인적인 이익에 기우는 그런 유권자에겐 대통령의 잘못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대통령이 잘못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영달에 급급해 잘못하는 일에 자신의 머리를 빌려주는 공무원과 지식인들이 많은 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추억은 초라함을 면치 못한다. 오직 정치적인 출세를 위해 소신 없이 권력의 움직임을 좇아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인이 많을수록 좋은 대통령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한국사람들이 갖고 있는 ‘대통령의 추억’이 삭막한 것은 한국사람 자신들의 탓임을 알아야 한다. 추억을 삭막하게 만든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그들을 활개칠 수 있게 만들어준 유권자 스스로를 먼저 탓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대통령의 추억’은 과거형으로 완료되지 않는다. 현재에도 진행형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되고 있다. 노무현, 그는 과연 국민에게 어떤 추억을 남기고 있을까.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 우려가 기우에 거쳐 국민에게 좋은 추억을 남기는 첫 대통령이 되어주길 진심으로 바랬다.
집권 2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고민도 이제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대통령의 추억’에 대한 기대도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대통령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람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있다.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 않는 절망감이 사람들을 거듭 불안하게 하고 있다.
임기를 절반도 넘기기 전에 사람들의 머리엔 ‘역시나’하는 ‘대통령의 추억’으로 가득하다. 별 도리 없이 속만 끓이며 세월 가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노대통령도 이제 집권 중반에 들어서고 있다. 그가 국민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죽어 없어진 과거를 버리고 살아있는 미래를 보아야 한다. 잘하려고 했지만 잘못한 게 더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시간을 지난 시간처럼 보내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은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 남은 임기동안 국민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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