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어어, 저기 저거...
김정도씨는 길가에 떨어져있는 자동차 휠캡을 보자 반사적으로 차의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아내인 송여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득달같이 송여사의 핀잔이 떨어졌다.
아이구, 이 양반이 또 시작이야. 그냥 가요, 주책 좀 작작 부리고! 그녀는 속이 터진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콩콩 치며 남편을 흘겨보았다. 한껏 치켜 뜬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곰팡이가 허옇게 앉은 간장항아리 끝에 새까만 숯 한 덩이가 떠있는 형국이었다. 김정도씨는 서슬 퍼런 아내의 핀잔에 별 수없이 단념을 하면서도 휠캡을 그냥 두고 가는 게 못내 아쉬웠다.
아내와 자식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평소 김정도씨는 길가에 떨어진 자동차 휠캡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한 번은 고속도로 갓길에 떨어져있는 휠캡을 줍느라 무리해 속도를 줄이는 바람에 달려오던 뒤차에 범퍼를 받힌 일조차 있었다. 이후로 집안이 지저분해지는 건 고사하고 자칫하면 비명횡사하겠다며 가족들의 만류가 한결 거세졌지만 그래도 틈틈이 모아놓은 휠캡이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찾아주고도 대여섯 개는 족히 넘었다.
사실 교사출신인 김정도씨는 고지식한 사람이다. 본인은 잘 모르겠는데 남들은 한결같이 그를 그렇게 말한다. 그 점에 있어 정도씨는 좀 억울하다. 예를 들면 자동차 휠캡만 해도 그랬다. 내가 조금만 수고하면 내 이웃들이 요긴하게 쓸 수 있는데 이처럼 손쉬운 이웃사랑이 어디 있다고 그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물론 휠캡 뿐만 아니라 그의 집 차고는 그가 끌고 들어온 잡동사니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지만 비록 낡은 물건이라도 잘 손질만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용할 사람이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집안이 어수선해 못살겠다며 운전하는 김정도씨에게 한참을 퍼붓고 난 송여사는 힘이 빠졌는지 이내 잠이 들었다. 차라리 아까 참에 잠이 들것이지... 아무튼지 그는 아내가 잠든 틈에 준비해둔 주례사를 소리내어 외워보았다. 에, 신랑 신부는 이 순간부터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지난 몇 주 동안 얼마나 정성을 들여 원고를 작성했던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주례사가 술술 쏟아져 나왔다.
나이 60이 넘어 컴퓨터를 배운 김정도씨가 최근 몇 년간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웹사이트관리다. 한 번 교사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죽을 때까지 참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옛 제자들을 위해 친히 ‘학교종’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주로 인생의 길잡이가 될만한 글들을 자신이 직접 쓰거나 인용해 올리는데 아쉽게도 사이트를 찾는 제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 결혼을 하는 제자와 연락이 닿은 것도 그 웹사이트를 통해서였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미 결혼해 자식을 두었으므로 정도씨로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서보는 주례였다. 조금 새삼스러웠지만 달포 전 그 제자가 주례부탁을 해왔을 때 그는 흔쾌히 승낙을 했다.
그런데 며칠 후 과일상자를 들고 김정도씨 집을 찾은 그가 쭈뼛쭈뼛 어려운 고백을 했다. 자신도 신부도 모두 재혼이라는 거였다. 좀 늦은 혼사다 싶기는 했어도 그 나이에 벌써 재혼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정도씨는 내심 당황했다. 제발 이번에는 백년해로, 꼭 백년해로해야 할텐데... 이후 주례사를 작성하는 내내 그는 전에 없이 어깨가 무거웠다.
어이구, 저러다 생병 나겄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디 주례사가 신통치 않아 그렇게 쉽게 헤어진답디까? 제발 적당히 좀 해두시유. 매일 밤늦게까지 성경과 불경에 논어와 중용까지 들춰대며 끙끙대는 그를 보다 못해 송여사는 이렇게 두어 차례 닦달을 해댔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젊은 시절 호랑이 선생님인 정도씨도 아내의 폭풍 같은 잔소리 앞에서는 번번이 기가 죽는 판이었다.
여보, 하다못해 쓰다버린 물건도 당신 손에만 가면 뭐든지 성성해져 새 주인을 찾아가지 않수. 당신이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데 그 사람들이 잘살지 못한 까닭이 없잖아요. 틀림없이 백년해로하고 잘 살거유. 어젯밤 먼저 잠자리에 들던 송여사가 모처럼 덕담을 건넸다. 종종 모질게 남편을 몰아세우기는 해도 그녀가 말솜씨보다는 마음씨가 훨씬 고운 여자라는 걸 정도씨도 본래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들 부부는 한 시간 남짓을 더 달려 식장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식이 시작되고 김정도씨 스스로도 자신의 주례사가 썩 감동적이라고 생각하며 단상을 내려왔다. 신랑 신부는 물론 양가 부모님들도 허리가 접히도록 깍듯하게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도씨는 파킹장까지 배웅 나온 제자에게 준비해 온 결혼선물을 건네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니, 당신이 언제 선물까지 다 준비해 두셨수? 송여사가 신기하다는 듯이 남편을 올려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며칠 동안 무얼 살까 고민만 하다 어제서야 가까스로 선물을 마련해 자동차트렁크에 실어두었으니까. 다른 때 같으면 속에 든 게 뭐냐고 캐물을 송여사가 오늘은 웬 일인지 그냥 넘어갔다. 정도씨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에그머니나, 세상에... 저녁을 하느라 냉장고 야채통을 뒤지던 송여사가 뿌리 쪽으로 반 토막이 덥석 잘려나간 파들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반토막짜리 파 너덧 단과 남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정도씨는 아내의 눈길을 피해 슬쩍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눈치 빠른 송여사가 고지식한 남편이 신랑 신부한테 파뿌리를 선물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불과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여봇! 당신 정말 제정신이유?..... 쏟아지는 아내의 비난을 들으면서도 김정도씨는 자신이 선택한 선물에 한 점 후회가 없었다. 상징적으로 한 두 뿌리만 넣었으면 안 들켰을 것을... 다만 그 점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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