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 선거는 대체로 경제가 좌우한다. 1980년 레이건은 “당신은 4년 전보다 형편이 좋아졌습니까”라고 물으며 백악관에 입성했고 1992년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다, 바보야”를 내걸고 선거에서 이겼다.
그러나 이처럼 선거 당일 날 경기를 대통령 직무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게 많은 경제학자들의 생각이다. 경기를 좌지우지할 미국 대통령의 능력은 제한돼 있다. 금리와 통화 정책은 대통령의 의지와 관계없이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가 결정하며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세금과 예산 지출인데 그것도 의회를 동의를 얻어야 하고 그나마 예산의 2/3는 소셜 시큐리티와 메디케어 등 아무도 손 댈 수 없는 고정비용이다.
이것저것 다 빼면 대통령이 주무를 수 있는 돈은 10조 달러가 넘는 미국 경제에서 수천 억 달러에 불과하다. 또 경제란 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폈다 하더라도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최소 수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에게 재임 기간 동안 미국 경제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인가. 그렇지는 않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다. 낮고 공평한 세금, 불필요한 규제 완화, 자유 무역의 확충, 특정 기업과 업종에 대한 혜택 삭감, ‘작은 정부’ 등등이 경제의 활력소라는 사실은 지난 수십 년 간 이론과 실제를 통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됐다.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대통령이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가 평가 기준이 되어야 옳다.
부시는 2000년 선거에서 자유 무역과 ‘작은 정부’ 신봉자를 자처하며 레이건 정신의 계승자임을 내세웠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시 이같은 이념을 지지하는 싱크 탱크인 ‘케이토 연구소‘나 ‘성장 클럽’(Club for Growth) 등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요즘 이들 단체가 부시를 보는 시각은 싸늘하다. 처음에 내건 공약 치고 제대로 지킨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취임 직후 부시는 ‘내 입술을 읽으시오. 세금 인상은 없소‘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를 어긴 아버지의 원죄를 씻으려는 듯 대대적인 감세에 총력을 기울이자 이들은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경기 활성화를 위해 부시가 한 것은 그게 전부였다. 2004년 대선의 승패를 좌우할 펜실베니아 등 접전주의 표를 얻기 위해 수입 철강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가 하며 농부 표를 의식, 사상 최대 규모의 농업 보조금 지원 법안에 서명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섬유업계를 의식, ‘테러와의 전쟁’의 동반자인 파키스탄이 의류 쿼터를 조금만 높여달라고 애걸하는 것도 한마디로 거절했을 뿐 아니라 지역 주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소위 ‘돼지고기’(pork) 법안에 대해서는 한번도 거부권을 행사한 적이 없다.
모든 결정을 할 때 여론 조사를 하고 그 흐름에 맞춰 움직여 ‘풍향계’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클린턴도 북미 자유 무역협정 때는 국익을 먼저 따져 민주당내 반대파를 무마했으며 철강 노조의 압력에도 불구, 끝내 외국 철강에 대한 관세 부과를 거부했다. 지난 4년 간 부시가 한 일을 보면 경제에 관한 한은 줏대 없는 지도자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지난 4년 간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 주도의 의회가 박자를 맞춰 가며 흥청망청 돈을 쓰는 바람에 2001년 향후 7년 간 5조 6,000억 달러 흑자가 예상되던 연방 예산은 이제 1.9조 달러의 적자가 나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나마 이 수치도 정부 발표고 민간 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적자폭은 9조 7,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세금을 거둬 쓰기만 한다”(tax and spend)고 민주당을 공격했던 부시와 공화당은 지난 4년 간 세금은 걷지 않지만 쓰는 데는 민주당 뺨치는 솜씨가 있음을 입증했다. 케리도 미국을 장기적으로 번영시킬 아이디어는 없는 인물이지만 지난 4년 간 표만을 쫓아 오락가락한 부시는 4년을 더 요구할 자격이 없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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