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민들에게 1776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엉클 샘이 영국군을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자유정신과 인본주의의 초석을 심은 해이기 때문이다. 같은 해, 바다 건너 조선에서도 경하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조선왕조 5백여 년을 통틀어 가장 영민한 현군이 등장했음에서다.
22대 정조, 역사가들은 그에게 ‘대왕’이란 칭호를 서슴없이 부여한다. 세종대왕에 이은 두 번째 역사 평가다. 문화 창달에서야 세종이 단연 돋보이지만, 시대적 정치 환경에서 볼 때 정조의 공적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세종이 초기 조선 왕조의 안정된 정치 분위기에 힘입어 여유롭게 문화 진흥에 힘을 쏟을 수 있었던데 반해, 정조는 험난한 정국과 씨름하면서 피폐해진 조선 왕조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보위를 건 대 혁파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24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조선천지를 피로 물들게 한 붕당정치’의 뿌리를 끝내 뽑아내지 못한 채 병사한 것은 조선왕조와 백성들의 크나 큰 불행이었다. 정조의 국가 선진화 정책이 바다 건너 유럽의 산업 혁명기와 일치한다는 점은 시사하는바 큰다. 그 웅지가 결실을 맺었다면 그의 사후 조선천지를 다시 황폐화 시킨 세도 정치와 내정문란도, 구한말열강의 침탈도 막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옛 이야기를 새삼 꺼 낸 나의 본뜻은 정조의 위업을 소개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다. 그가 제도 혁파를 추진하면서 남달리 총애한 한 신하의 명언 한마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다. 연암 박지원. 하필 김대중 정권의 어떤 세도가 이름 석 자와 동일하다만 어디 둘을 비교하랴. 연암은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로 돌아가 글짓기로 생을 마친 고고한 인격자 였다.
당시 다산 정약용, 북학(서양학)의 거두 이가환 등도 대 문장가였지만 연암의 박학다식하면서 서민적인 글맛은 단연 압권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남겼다. “글은 사람이니라.” - 글 속에는 지은이의 온전한 인격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어디 인격뿐이랴. 지식의 깊이, 인생철학과 사상 등도 함께 녹아들어 있다 할 것이다.
40여 년 전 신문기자의 길을 걸으면서 주제넘게 써 온 수많은 글들의 스크랩을 펼칠 때, 그리고 원고지나 컴퓨터 앞에 마주 않을 때마다 연암의 그 한마디는 나의 뇌리를 치곤했다. 나의 모든 것이 알게 모르게 나타나 있을 그 졸문의 글들을 딴에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마구 써 댄 것은 아닐까 수치심이 엄습해 오기 일쑤였다.
‘미주 한국일보’에 정치 칼럼을 써 온 지도 어언 3년이 넘었다. 길다면 긴 시간, 제법 책 한 묶음이 될 법한 양의 글을 쓰면서 나는 늘 연암의 경문을 되새기곤 했다.
내 글의 비판 대상은 예외 없이 집권자와 권력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언론인의 기본 사명 중 엄지로 꼽아야 할 것이 ‘워치 독’(경비견의 기능)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민주국가에선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따라 권력을 감시하는 장치로서의 언론 기능을 존중한다. 권력과 언론의 팽팽한 긴장이야 말로 권력 남용과 부패를 방지하는 최선의 방책인 까닭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무현 정권과 비판 언론과의 전쟁은 바로 이 ‘워치 독’의 역할과 기능을 부정하고 죽이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내편 언론, 주요 TV와 좌파 언론에 온 정성을 쏟고 있는 집권자의 태도가 이를 반증하지 않는가. 저 권력자들의 부정부패와 오류를 비판하기에도 지면은 모자란다. 하물며 한두 가지 잘 한 것을 찾아 내 ‘잘 했군 잘 했어!’하고 찬사를 늘어놓기엔 지면과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게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어쨌거나 내가 시종일관 집권자를 향해 날린 비판의 화상에선 독설만 뚝뚝 떨어졌다고 나무라는 독자들에겐 이 기회에 이해를 당부한다. 반면 할 말 했다거나 “저래도 괘씸죄 안 걸릴까?”하고 걱정한 독자들도 있었다는 전문에 나는 많은 위안을 받았다. 그 괘씸죄라는 말이 통용된다는 게 바로 우리 조국의 비극이다. 민주화가 됐다고 외쳐댄 게 벌써 10여 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언론자유는, 김대중-노무현 세력이 욕해대는 군사 정권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때는 무지막지하게, 지금은 아주 교환하게 언론의 목을 조이고 있다.
도대체 비판 언론사를 무더기로 표적 세무조사하고 (김대중 시절) 대통령이라는 이가 비판 가사에 화를 벌컥 내고 수 십 억 원의 손해배상을 거는 민주 국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미국에서도 오보를 상대로 공직자가 소송을 내는 일은 있다. 하지만 배상액을 1달러로 하는 경우를 귀동냥도 못해보았으며 그 의미가 무언지 헤아릴 능력도 없단 말인가.
지금까지 졸문을 게재해 준 ‘미주 한국일보’와 그 졸문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인내를 갖고 읽어 준 미주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뿐이다. 나는 지난 3년간의 기록을 언론인생의 값진 자산으로 간직할 것이다. 작은 박수소리나마 들릴 때 떠나라했던가. 이제 펜을 놓을 시간이 됐다. 아디오스, 아미고!
안영모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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