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글벗의 초대로 H와 함께 그의 집에서 한나절을 즐겁게 보낸 일이 있었다. 정초에 그녀 집에서 가진 문우들의 정기 모임 때 감기로 인해 불참했었기에 궁금하던 터였다. LA까지 와서 나를 픽업하고 한국 마켓에서 장까지 본 후 도착한 그의 집은, 차고 옆으로 소박한 전원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텃밭이 눈에 띄었다.
부목위로 뻗어 오른 호박 넝쿨 아래 토마토 오이 상추 쑥갓 깻잎들이 고루 자라고 있었는데, 널따란 물 통속에 무리 지어 있는 미나리 양식이 특이했다. 그녀 남편이 끔찍한 애착을 갖고 있다는 대추나무는, 통통한 열매들이 촘촘히 맺힌 듬직한 몸매로 차고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붉게 익으면 교회 분들이 많이 찾아 오셔요.” 수십 바구니의 수확을 보증하는 푸른 알들이 성숙한 가을 옷을 입게 되면, 그 성장의 놀라움과 결실의 기쁨을 고마워하는 이웃들의 기다림을 채워 준다고 한다. 높게 솟은 큰 가지들의 무게를 의연히 받히고 서 있는 덩치 큰 나무는, 이 집주인들과 걸맞게 자랑스런 모습이었다.
앞뜰에는 잘 올려진 조롱박이 주렁주렁 인상적이었고, 연두와 감청색의 잔 포도 넝쿨이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아치’(Arch)를 소담하게 덮고 있었다. 열무와 호박이 열린 마당 한편으로는 무화과나무가 정좌해 있었는데 또 다른 밭 모양을 구상 중인 듯한 여백이 있어 다음 모습을 기대하게 한다.
물감이 담겨 있는 ‘팔레트’와 습작 중인 캔버스 유화가 벽에 기대 서 있는 유리문 밖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녀의 빠른 솜씨로 준비한 신토불이의 점심을 들었다. 좀 전에 버무렸던 열무김치와 미나리 초나물이며 냉장고에서 꺼낸 배추 잎 저림, 그리고 상추 깻잎 등에 즉석 구이 불고기를 얹어 먹는 무공해 채소의 쌈 밥이었다. 두부와 버섯이든 토종 된장국으로 미각을 돋구며, 흰 접시에 담겨진 주홍빛 ‘토마토’가 돋보이는 산뜻한 배색의 식탁이었다. 넓은 거실로 옮겨 앉은 우리는, 향기 좋은 커피와 ‘케익’의 후식을 음미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근황까지의 사연 많은 기억들을 부담 없는 재치로 담담히 풀며 나누었다. 나름대로 전개된 인생 여정을 각자의 성품대로 조정하며 극복한 삶의 역사가 감동적이었다. 우리가 감당 할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는 창조주의 말씀을 진지하게 긍정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멋있는 작업실은 따로 없지만 “누워 있다가도 그리고 싶은 의욕이 솟곤 해요.”하는 열성을 알리듯, 집안 전체가 그녀의 ‘아틀리에’였다. 식당의 벽장 위에도 그림들이 놓여 있었고, 침실과 거실의 사방 벽에 둘러 전시된 크고 작은 작품들, 하물며 냉장고 옆과욕실 벽면까지 온통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호흡하고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그림 공부였지만 일하며 살림하며 글을 쓰는 벅찬 일상 가운데 기울인 열정으로 완성된 유화 들 이었다. 굵고 강하게 섬세하고 유연하게 다양한 ‘터치’로 표현된 그녀의 심미안이 놀라웠다. 이제 취미 단계를 넘어선 수준에 이른 예능적 소질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그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공감한다. 더불어 각박한 현실에서, 숨통 트이는 정서 생활에 윤기를 더할 수 있도록 여건을 배려해 준 그녀의 남편이 무척 고마웠다. 바른 믿음과 온전한 인격으로 맺어진 관계에서, 싹틔우고 가꾸며 알찬 열매 맺는 생활 리듬을 유지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게 무엇이겠는가. 노력하며 성취한 꿈의 실현이 대견하고 가슴 뿌듯했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 삼아 격의없이 이어진 오후 시간은, 완벽한 시청각의 풍요로움이었다. 만남과 나눔의 멋진 교감으로 느긋한 여유를 누린 우리는, 아쉬움을 안고 일어섰다. 사선으로 반사되는 차창의 햇살 너머로 청 회색 하늘이 가까워지는, 안식과 충전을 위한 귀로의 ‘후리웨이’도 바빠져 온다. 우리의 차량도 그 행렬에 섞이어, 새날의 밑거름으로 남겨질 의미 있는 하루를 차분히 접는다. 단맛 오른 과육의 성숙한 대추알처럼, 그녀의 화폭위로 충실한 삶이 미소로 이입되길 바라면서.
이인숙
약 력
‘한국수필’ ‘현대시조’로 등단.
‘미주한국일보’신춘문예 “시”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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