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 연극무대
감동으로 다가온 ‘알몸의 경이’
언어장벽 뚫고‘인간냄새’물씬
족함 없는 LA에 살다보니 부러운 것도 불편한 것도 그다지 없지만 가을 무렵이 오면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동숭동 마로니에 길에 노란 낙엽이 가득하던 계절,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펼쳐지던 연극 공연들이 바로 그것이다.
송승환, 강태기의 소름 돋는 연기를 보며 숨을 죽이던 대학로 소극장에서의 추억은 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날, 문화에 대한 배고픔을 채워주었다.
삼일로 창고 극장, 세실 극장, 100명도 채 들어가지 않는 소극장의 객석에 앉아있다 보면 배우들이 거친 손짓을 할 때마다 땀방울이 튀었고 강한 대사를 전달하는 배우들의 침에 얼굴이 젖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일까. 그들과의 진한 교감으로 육체와 영혼은 온통 불덩이가 되어 후끈 달아올랐었는데.
실험 정신이 강조되는 예술 장르이다 보니 때로는 충격적인 장면들도 많았다. 여배우가 옷을 벗는 장면에 입이 헤 벌어졌는데 채 그 벌어진 입이 닫힐 틈도 없이 남자 배우가 옷을 벗어제치며 은밀한 사랑을 나누던 ‘에쿠우스’를 지켜보면서 침을 꼴깍 넘기기도 했었다.
우리의 나태해진 감성을 자극하는 데 있어 차가운 공기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문화적 충격은 삶에 있어 고마운 촉매제다.
그런 자극이 그립다고 비행기 타고 대학로로 날아갈 수는 없는 일. 물론 가까이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에도 삶에 바짝 탄력을 주는 진지한 연극 공연들이 제법 있지만 영화 한 편 보기가 빠듯한 것이 현실인데 연극 한 편 보자고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누리기 쉽지 않은 문화적 사치다.
연극 무대 찾기를 망설이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언어일 터이다. 제 아무리 영어에 능통하다 하더라도 미국인들도 잘 못 알아듣는 문학적 표현들이 귀에 쏙쏙 들어올 리가 있나.
안 들리는 대사를 들으려 애쓰다가 더 이상 스토리를 따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배배 틀며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문화 사각지대라고 생각되는 LA에도 꽤 많은 연극 공연들이 있다. 특히 한인 타운 가까운 곳의 할리웃과 NOHO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노스 할리웃은 소극장 밀집 지역. 거리에 휘날리는 깃발에도 이 지역의 특성을 말해주는 마스크가 그려져 있다.
1년 전이었나. ‘에쿠우스’를 공연한다는 캘린더의 광고를 보고 구석에 틀어박혀 있는 Deaf West Theatre란 작은 극장을 찾았다. 피터 셰퍼 원작의 ‘에쿠우스’라면 이미 한국에서 몇 차례 봤던 연극이라 대사를 듣는 노력 없이도 공연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공연은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우선 배우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언어 장애자들. 때로 거칠고 때론 부드러운 그들의 수화를 이해할 길 없었지만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전라의 몸으로 고통과 희열을 표현하는 그들의 공연은 거룩할 만큼 감동적이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한여름 밤의 꿈’은 연극 무대에 자주 올려지는 작품 가운데 하나.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좁은 올드 패사디나의 레이몬드 극장에서 지켜본 셰익스피어는 유쾌했다.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는 진정 위대한 작가다. 런던의 가을을 수놓는 셰익스피어 축제를 LA에서 경험하는 기쁨은 컸다.
LA의 소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는 창작 뮤지컬은 연극을 더욱 가깝게 할 수 있는 형태의 공연 예술이다. 물론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계속적으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같은 스펙터클한 면은 없지만 때로는 아주 감각적인 멜로디와 댄스를 대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동양인 이민자들이 꾸미는 연극은 같은 형편에 처한 한인들에게 보다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Glen Chin 연출, Bryon Lee가 각본을 쓰고 직접 출연한 연극 ‘Paper Son’을 보며 거대한 미국 땅에 홀로 내던져진 것처럼 솟구치는 외로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나 하나가 아니었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서 한인들의 커뮤니티가 더욱 커져 한국어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연극을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연극 공연을 즐기는 것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즐거움은 아니다. 창작극일 경우에는 웹 사이트를 통해 어떤 내용인가 충분히 연구를 하고 고전극일 경우는 책을 읽고 간다면 21세기 미국의 극장 예술의 현주소를 파악할 만큼 공연을 깊이 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애를 써가며 얻어지는 색다른 감동은 분명히 존재한다.
글/사진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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