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통령은 세계 최강국의 지도자라고 하는 막강한 지위에 있지만 국민의 여론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와 같다. 여론의 향배에 따라 선거에서 당락이 결정되므로 선거 과정에서 여론의 변화에 대단히 신경을 쓴다. 선거운동 중에 지지도가 좋지 않으면 정책 공약이나 선거운동 전략을 대다수의 여론에 맞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당선된 후에도 국민의 다수 여론을 의식하기 때문에 공약사항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 실행 여부가 달라진다. 그리하여 때로는 보수적인 민주당 대통령이나 온정주의적인 공화당 대통령이 나오기도 한다.
나라와 국민을 이끌고 가는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모든 조직을 이끌어 가는 책임이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수 조직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상례이다. 어느 단체의 장이 자신의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단체원 대다수가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가장의 의사가 확고하다고 하더라도 많은 가족이 원하면 가족의 의사를 따르게 된다. 이럴 때 그 단체나 가정이 민주적인 단체요,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대통령이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민들을 통합해야 하는 자리인데 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국민의 힘을 국력으로 동원하지 못하게 된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반대 진영과 치열한 선거를 치르지만 일단 대통령이 되고 난 후에는 지지자들은 물론 반대자들까지 포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대통령이 된 사람들의 처신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도 집권기간 내내 국민들의 지지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국민이 주인이요,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무엇이든지 국민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하지만 막상 되고 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존재가 된다. 대통령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그대로 결정되어 버리고 정부나 여당은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는 꼭두각시처럼 되어 버렸다. 국민의 다수가 무엇을 원하고 주장하던 상관이 없고 대통령의 의사가 절대로 중요할 뿐이다.
이런 대통령을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하여 과거의 대통령을 비판하는 말로 쓰였으나 지금의 대통령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썽 많은 보안법 존폐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폐지 의사를 밝히자 여당에서 앞 다투어 폐지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그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금 개혁이라는 거창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과거사를 들추어서 잘못을 가려내고 제도를 뜯어고치고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고 있다. 마치 건물의 벽을 헐어내고 내부를 바꾸고 도로를 곳곳마다 파헤쳐 놓아 가는 곳마다 교통이 막히고 먼지투성이가 된 불편이 따르는 것과 같은 현상을 빚고 있다. 이런 개혁이 제대로 되는 것이라면 일시적인 희생이나 불편은 감수해야 할 것이지만 멀쩡한 건물이나 도로를 까부수는 파괴행위라면 그에 책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개혁의 중심에 대통령이 있다. 개혁의 중심에 있는 대통령은 마치 태풍의 중심처럼 바람이 없다. 여야의 정치인, 사법부와 검찰, 군부와 재벌, 심지어는 언론에 이르기까지 힘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가장 힘이 큰 대통령은 개혁에서 제외되어 있다.
개혁에 성역이 없다는 말을 수없이 하지만 분명히 성역은 있다. 한국의 대통령 자리는 어떤 경우에도 성역이다. 언제나 개혁은 한다지만 개혁이 성공하지는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제대로 하는 개혁은 어떤 것일까. 대통령이든 누구든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하는 개혁이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대로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고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수 국민의 바램이나 생각은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변화에 맞게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 개혁이다. 미국은 이런 방식으로 개혁을 하지 않으면서도 개혁을 해 왔다. 한국에서 이루어야 할 가장 시급한 개혁은 대통령이 성역의 자리와 유아독존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국민의 의사로 국정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민주국가로 개혁하는 것이다.
이기영<본보 뉴욕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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