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중학생 시절 살던집 대문 바로 안쪽에는 다알리아 꽃밭 가운데 어른키 보다 두배 정도 되는 라일락 한 그루가 있었다. 밖에서 보면 콘크리트담 위로 나무 끝이 불쑥 솟아 있었고, 큰 가지 몇개가 담 밖으로 나와서 키 큰 어른들은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우리 어머니는 라일락을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지, 어쩌다가 동네 꼬마아이가 라일락 한가지만 꺽어가며는 끝끝내 범인을 찾아 혼을 내 주곤 했던 것이 기억난다. 라일락은 꽃도 아름답지만 그 향기가 특히 좋고 아주 멀리까지 간다. 라일락꽃 피어서 한창일 때에는 집에서 한참 떨어진 동네 앞 개울가에서도 그 향기를 마실 수 있을 정도였다. 친구들과 정신 없이 놀다 늦은 밤 아무도 없는 길을 따라 집에 돌아오다가 집 앞에 흐르는 개울가 모퉁이를 돌아서면 라일락 향기가 코로 스며 든다. 집에 다 왔다는 안도감으로 편안해지고 괜히 행복하다고 느끼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
라일락은 초롱 같은 작은 꽃잎들이 큰 꽃줄기에 가지런히 붙어 있는데, 그 모양이 무척 탐스럽고, 채 익지 않은 포도 송이 같아 보인다. 넓직 넓직한 파란 나뭇잎 사이로 그 끝만 고개를 내미는 것이 꼭 수줍은 처녀 아이의 앙증맞은 모습을 보는것 같은 상쾌함이 있다. 라일락은 물색이 짙어 햇빛을 받아도 그 빛갈이 곱고 귀하지만 달 빛을 받으면 그 모습이 처연하도록 아름답다. 뿜어 나오는 향기 강하고 또한 일품이어서 꽃이 한창일 때면 온 집안이 그 향기로 가득 가득 넘쳐난다. 그 향기가 벽장속에도, 이불에도, 소파에도, 부엌에도, 스며든다. 교복에도 스며 있어서 학교 가는길 내내 지워지지 않곤한다.
라일락 향은 장미향처럼 유혹적이지도 않고 쟈스민 처럼 쎅씨 하지도 않다. 백합처럼 강렬하지도 않고 목련처럼 그윽하지도 않다.
젊고 활달한 처녀에게서 나는 싱그러운 향이 난다. 라일락 향은 싱그럽고 선한 느낌이 많아서 좋다. 라일락 향기에도 유혹은 있다. 거절 당할 것 같은 차가운유혹이다. 은근하면서도 가까이 가면 샐죽해져 버릴 것 같은 유혹이다. 라일락에서는 풋사랑 같은 냄새가 난다.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시냇물 같은, 새벽 이슬 같은 풋풋함이 있다.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라일락꽃이 피면 적당한 이유 붙여서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은근히 자랑을 하곤 했다. 달빚 밝은 밤에 친구들과 마루에 앉아 갓 쪄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가운데 두고 우리는 서로 질세라 끊임없이 이야기 하곤 했다. 사춘기 열정을 입으로 삭혔는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던지, 가슴 가득히 넘쳐나는 풋 열정을 아마 쟈스민 향이 은근히 녹혔던 것 같다. 밤이 늦으면 어른들 잠든 후에도 헤어지지 못하고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밤이슬을 맞곤 했다. 어른들에게 야단 맞고도 헤어지지 못하고 동네 앞 개울 가에 걸터 앉아 초여름의 열기들을 식혔다. 그 때에도 라일락 향은 우리의 코끝을 간지르고 있었다.
십여년 전 처음 LA에 왔을 때, 자카란다 꽃이 피면 옛날 집에 있던 라일락 생각이 나서 자카란다 가득피어 온통 보라빛인 길을 무작정 걸어 보곤 했다. 라일락과 달라서 자카란다는 나무도 무척 크려니와 보라색 꽃이 온 나무를 덮고 있어서 나뭇잎도 보이지 않고 꽃이 필 때면 온통 보라빛 일색이다.
파란 나뭇잎 사이로 언뜻 언뜻 얼굴을 내미는 라일락과는 모양 부터가 너무 다르고 향기도 없어서, 그냥 발밑에 떨어져 밟히는 꽃잎만 주워서 코에 대고 향을 맡아 보다가 실망하고 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무엇이던 오래 같이 있으면 정이 생기는가 보다. 이제 십여년을 보아와서 그런지 자카란다 피는 계절이 되면, 자카란다가 줄지어 피어있는 곳이 보고 싶어 진다.
자카란다는 아침 햇살 받은 때가 제일 좋다. 새벽 이슬이 아직 걷히지 않아 촉촉히 습기가 배인 영롱한 꽃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면 보라 빛의 화려한 군무가 시작된다. 자카란다가 만발하는 계절이면 동네가 온통 보라 빛이다. 보라색 눈이 내려 덮인 것 처럼 지붕에도 차위에도 잔듸 밭에도 모두 모두 보라빛 꽃잎으로 덮인다. 보라빛 향연이 펼쳐지는 것이다.
바람 한번 언뜻 불면 온세계가 바람에 날리는 보라 꽃잎으로 축제를 하는것 같다. 바람에 불려 날으는 보라빛 군무를 나무밑에서 보고 있노라면 마치 환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 현란하기만 하다. 바람에 실려서 나르는 꽃잎 마다 아침 햇살이 내려 앉아 반짝이며 빛을 내기 시작 하면 보라 꽃잎이 수십 수백가지의 빛으로 변하면서 나비 같이 날개짓 하며 서로 어울려서 나르듯이 파도 타듯이 미끄러지듯이 춤을 추며 바람 타고 내려 온다.
한참을 홀린 듯이 그렇게 있으면 머리에도 어깨에도 잔듸위에도 보도 블럭에도 온통 하까란다 꽃잎이 내려 앉아 보라빛 물감을 들인것 같이 보인다. 자카란다의 향은 아니지만 이슬 머금은 시원한 새벽 향기가 코 끝에 스며든다. 멀어진다는데 그래서 그런가 어느새 라일락이 차지하고 있던 곳을 자카란다가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하까란다가 만발한 곳을 혼자 걸으면 쓸쓸할 것 같다 손 잡고 같이 걸어줄 사람을 찾아서 하까란다 활짝핀 거리를 정답게 걸어 보고 싶다.
차귀동
약 력
▲월간 순수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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