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민석형, 그간 잘 지냈어요? 오늘이 벌써 처서네요. 이제 그 찜통 같은 무더위도 한풀 꺾이지 않겠어요? 세계에서 가장 날씨가 좋다는 이곳 캘리포니아는 겨울도 겨울답지 않고, 여름도 여름답지 않아요. 마치 밋밋한 제 삶과도 같이.
물론 저도 알아요. 취업난에 시달리는 한국의 제 또래들에 비하면 저는 엄청난 행운아라는 걸. 제가 다니는 무역회사는 규모는 작아도 꽤 탄탄한데다가 주 무역 대상국이 한국이다 보니 영어스트레스도 거의 없는 편이죠. 게다가 처삼촌이 사장이니 큰 이변이 없는 한 평생직장이 되지 않겠어요? 와이프 벌이도 생각보다 짭짤해요. 지금은 타운 내에서 제일 큰 사진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형도 알다시피 그 사람 사진솜씨 하나는 알아주잖아요. 결국 그 사진솜씨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발목잡히게 됐지만요.
이크, 미안해요. 형은 예전부터 우리 와이프 편이였지요. 제가 결혼을 앞두고 망설일 때, 형은 그 사람이 내게는 과분한 여자라며 제 결심을 부추겼지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 사람의 시지도 달지도 않은 밍밍함이 답답해요. 외모도, 성격도 도무지 개성이라고는 없잖아요. 잘 아시겠지만 제가 좀 튀는 여자들을 좋아하잖아요. 싫증도 잘 내고. 기억하세요? 학창시절 제 별명이 카사노바였던 것.
집사람이 처음 제 앞에 나타났을 때가 생각나는군요. 그때 대학원생이었던 형이 우리 동아리 고문을 맡고 있었고 저는 3학년 복학생이었죠. 그날은 우리 동아리에서 가을야유회를 갔었는데 우연히 그 사람이 동행을 했던 거죠. 집사람이 동아리 후배인 효선의 친구잖아요. 당시 저는 갓 회원이 된 주희한테 홀딱 빠져있어서 그 사람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었어요. 제법 큰 카메라를 들고 왔다는 것 외에는. 제가 집사람한테 관심을 갖게 된 건 그후 일주일쯤 지나서였지요. 그 사람이 그날 찍은 사진을 들고 저 혼자 지키고 있던 동아리방을 찾아왔는데 그때 저는 그 사진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뛰어난 순간포착에다가 완벽한 구도까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미 수상경력이 화려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였지요.
그런데 형,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하데요. 그 사진들을 보는 순간 비록 외모는 수수하고 말솜씨도 어눌하지만 그녀의 내면 어딘가에 숨겨진 열정 같은 게 문득 궁금해지는 거예요. 나란 놈이야 원래 깊이는 없고 그럭저럭 인생을 즐기며 살려는 속물일 뿐이잖아요. 내가 갖지 못한 그녀의 어떤 진지함에 끌렸던 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사람은 가족들과 떨어져있는 외로움을 사진으로 달랬던 것 같아요. 죽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가겠다는 그녀의 고집에 가족들은 앞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니까요. 친척집이 아무렴 제 집 같기야 하겠어요?
어쨌거나 우리 두 사람은 그날 이후로 몇 번을 더 만났어요. 주희와의 관계는 여전히 진행을 하면서요. 가끔 주희의 까탈에 지친 기분이 들면 그녀를 불러내 서울근교로 야외촬영을 함께 나갔죠. 그녀는 주희만큼 미모도, 또 재치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편한 맛은 있었어요. 맛동산 한 봉지와 콜라 한 캔으로 점심을 때우게 해도 그냥 오물오물 잘 먹는 모습이 그리 싫지는 않았던 게죠. 그러다가 어찌어찌 결혼하게 된 과정은 형도 이미 잘 아는 바고요.
결혼생활이요? 솔직히 덤덤해요. 처음엔 객지에 적응을 하느라 힘들어 그런 줄만 알았어요. 신혼여행을 마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미국으로 건너왔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미국생활도 2년이 지났고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는데도 별로 달라진 게 없네요. 한마디로 그 사람은 도무지 무드를 모르는 여자예요. 그러고도 어떻게 그렇게 감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정말이지 신기하다니까요. 사실 미국에 와서 그 사람이 미장원에 간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예요. 화려하게 꾸며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가 생전가야 멋을 부리나 남편한테 소위 애교라는 걸 떨 줄 아나... 솔직히 결혼 이후 퇴근시간이 기다려진 기억이 별로 없네요. 신혼인 남편이 그렇게 시큰둥하면 뭔가 불만이 있다는 걸 눈치채야 하는데 그 사람은 끝내 태평이에요. 여전히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기계처럼 직장에 가고... 지금 생각해보니 졸업을 위해 한국에 남아 있었던 게 아니라 신랑감을 구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의심이 간다니까요. 마치 얌전하게 사냥감을 찾고 있다가 파리 따위를 덥석 무는 끈끈이주걱처럼 말이에요. 말하자면 제가 그 가엾은 파리 신세가 된 거지요.
아, 죄송해요. 제 표현이 너무 지나쳤군요. 하지만 결혼기념일에 바닷가라도 나가자는 남편에게 날 궂은데 바다는 뭐 하러 가냐고 되묻는 여자도 있나요? 그렇게 무신경하니까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지요. 그나저나 지난달에 주희가 출장 차 이곳에 다녀갔어요. 직장에 하루 휴가를 내고 그녀를 위해 관광안내를 해주었지요. 마누라랑 못 나간 그 해변도 그날 주희와 함께 걸어보고요. 주희는 여전히 매력적이더군요. 그런 여자를 두고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운명이 다 야속하더라니까요. 솔직히 와이프한테 죄책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워낙 무심한 사람이니 별다른 눈치는 못 챈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오늘 집사람이 불쑥 전화를 해서 제게 점심을 사달라는 거예요. 내심 주희 건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가려니까 굳이 순두부가 먹고 싶데요. 주희랑은 프랑스요리를 먹었는데 칼질도 어찌나 세련되게 하던지... 그나저나 모내기를 하고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여자가 밥을 그리 겁나게 잘 먹어요? 게다가 요즘 와서는 차만 타면 꾸벅꾸벅 졸고 TV 앞에서도 걸핏하면 잠이 들어요. 그렇게 나른해 하면서도 무슨 입맛으로 밥은 그리 잘 먹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했지요. 적당히 좀 먹으라고, 더 살찌면 눈도 안 보이겠다고. 그랬더니 그 사람이 갑자기 수저를 내려놓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순간 제가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늘 방실거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화를 내거나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거든요. 좀 심심하기는 해도 한결같은 데는 있는 여자잖아요.
더 놀라운 건 그녀가 오전에 병원에 갔었다는 사실이에요. 당연히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임신이래요. 그 순간 정말 기분이 묘하더군요.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그간 서로 확실하게 약속한 적은 없지만 내심 조그만 집이라도 장만하고 나서 아이를 갖으려고 했거든요. 아마도 자꾸만 졸고 나른해했던 거랑 그 엄청난 식욕이 다 임신 때문이었나 봐요.
형, 그때 제가 그 사람한테 던진 첫마디가 뭔지 아세요? 두부샐러드 하나 테이크아웃 해갈까였 어요. 그날 아내가 자기 몫의 해물순두부를 시키고도 옆 테이블의 두부샐러드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거든요. 그래도 되겠냐며 눈물을 마저 훔치는 그녀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하마터면 꼭 껴안아줄 뻔했다니까요. 정말이지 그런 감정은 평생 처음이었어요. 총각시절 만나던 그 많은 여자들이랑 심지어 이번에 새삼 마음을 흔들고 돌아간 주희한테조차도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감정이었다구요. 뭐랄까, 이제야 정말 그 사람과 내가 한 몸이 된 듯한 느낌, 내 여자라는 느낌... 그러고 보니까 도톰히 살이 오른 뺨이랑 통통한 손등도 막 사랑스러워지는 거 있지요.
그런데 말이에요, 막 두부샐러드를 받아든 아내가 제게 통쾌하게 한방 휘니시블로우를 날리더군요. 다시는 혼자서 주희 만나지 말아요. 사실 그 동안 많이 속상했어요. 나도 여자라구요.
형, 정말 저란 놈도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요? 좋은 아빠는요? 가능하면 지금까지 아내에게 못 준 사랑 평생 두고두고 갚고 싶은데 제가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네요. 형도 알다시피 사실 그 사람 너무 너무 착하고 속 깊은 여자잖아요.
형, 고마워요. 그때 제가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제게 믿음을 심어준 것 말이에요. 최선을 다해 멋지게 살아볼게요. 찬바람 불면 다시 연락 드리죠. 안녕히 계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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