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령
며칠 전 모르는 분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분은 수필가협회에 들어가면 자서전 쓰는 것도 가르쳐 주느냐고 내게 물었다. 순간 조금 당황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필을 공부하다 보면 그런 건 자연히 잘 쓸 수 있게 될 거라고 대답했다.
이 말이 그분이 바라던 충분한 대답은 아니었을 것으로 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질문을 전화로 받은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요즈음은 자서전을 쓰려는 사람들도 많고 대필해 주는 사람들도 많다. 정주영 회장의 부탁을 받고 그의 자서전을 써준 방송작가 김수현,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대필해 준 작가 천금성 등등.
자서전이라! 나 자신 글을 쓰면서도 자서전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건 나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서전이라는 것, 대단한 사람들만 쓸 수 있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면 우린 모두가 선장이다.
자신의 운명을 항해하는 선장, 사람으로 태어나서 추운 겨울 밥 세끼를 해결하며 종점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우리들을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 대단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자서전을 쓸 수가 있다. 특별히 태어난 곳을 떠나 이역에서 살아온 동포들의 삶이야 모두가 비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을 건너고 산을 넘으며 굽이굽이 살아온 이야기들을 덮어두고 가기엔 너무 아프고 힘겨웠던 것들 아닌가? 그리고 뒤를 이어오는 아이들 손에 꼭 쥐어주며 거울삼으라는 간절한 부탁의 의미 또한 거기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수필가협회 회원이기도한 후배가 자서전을 쓰고 있다는 말을 내게 했을 때 나는 ‘뭘 벌써’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당찬 의욕에 압도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젊어서 쓰는 자서전은 기억력이 좋을 때 쓰는 것이라 정확해서 좋을 것이다. 그때그때 일기 쓰듯 써 놓으면 나중에 힘겹지 않아서도 좋으리라. 20세기의 괴짜이며 천재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 그는 지금부터 꼭 100년 전에 태어났지만 남다른 생각을 했던 사람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보통 인생을 다 산 다음 말년에 가서 회고록(자서전)을 썼다.
그러나 그는 먼저 회고록을 쓰고 그 다음에 그 내용을 사는 것이 훨씬 지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책 속에 그가 앞으로 그릴 그림, 그가 쓸 책, 정리해야 할 이론, 심지어 그가 발명할 것들의 목록까지 넣어 두었다. 그리고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그 내용들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스페인 대란이 한창이던 때 프랑코를 외면하고 사랑하는 유럽이 긴 전통의 잠에서 깨어나길 바라며 그는 미국으로 오는 ‘액체비온’에 몸을 실었다.
미국이 그에게 예외적인 자유의 땅으로 보였다고 그는 그의 책 속에 쓰고 있다. “미국은 우리, 유럽인들에게 초월적 교훈을 전해주는 고독하고 명철한 지성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라고 쓰기도 했다. 그가 버지니아주 햄튼매너에서 이 책을 완전히 탈고한 게 1941년 7월30일 12시, 그의 나이 36세 때였다.
이 책을 이듬해 뉴욕의 다이얼 프레스사에서 출판했다. 자서전이 다 되어 가면 그 다음에 할 일이 또 있다. 유서를 쓰는 일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죽음은 불쾌하니 되도록 생각할 필요가 없고 사는 날까지 잊고 사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생자필멸, Man is mortal, 갈 길을 알고 때때로 이를 생각하면서 살 때 실수도 줄고 후회도 줄 것 같다.
자서전은 안 썼어도 유서(유언)를 써둔 동포들은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도 몇 년 전 법적으로 유효하도록 변호사를 통해 작성해 두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건 정말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들이 아니다. 두고 갈 재물의 분배와 사후 처리에 관한 당부일 뿐이다.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는 부탁이다. 일본 홋카이도의 여우는 때가 되면 말없이 새끼들의 곁을 떠난다고 한다. 따라오는 새끼들을 그윽이 바라보면 새끼들이 알아차리고 따라가기를 멈춘다고 한다. 또 이윤기의 글 속에 나오는 개는 마지막 밥을 깨끗이 먹은 후(주인에게 감사하는 표시로) 사태가 나기 쉬운 비탈진 곳에 자리 잡고 눈을 감는다고 한다. 새끼들을 두고 가야하는 건 동물도 사람도 똑같다. 동물과 다른 사람값을 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짤막짤막한 시간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 모두가 자서전과 유언이 되고 유서가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약 력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수상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워싱턴 여류수필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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