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6일 오후 서울 홍익대학교 근처의 아담한 맥주 집. 몇 년만에 한국을 방문해 죽마고우 같은 친구 넷과 자정이 넘도록 신변잡기에서부터 고상한 사회 이슈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가운데 친구들이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한 것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안주를 무색케 한 ‘진짜 안주거리’였다.
이날 만난 친구들은 저마다 역사 문제에 대해 깊은 이해와 또렷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10여 년간 대학 강단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많은 연구기록을 갖고 있는 사학교수, 미국의 역사와 문학을 천착해 온 영문학 교수, 역사 관련 사설과 칼럼을 쓰고 있는 중앙일간지 논설위원, 역사와 관련한 기획물 제작으로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공영방송 프로듀서.
점잖은 곳에 가면 조심스럽게 말하고 상대방 주장을 경청하는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지만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원색적이다시피 한 용어를 섞어가며 자신이 옳다고 목청을 높였다. 20여년 전 이틀이 멀다않고 소주를 마시며 독재정권에 비분강개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격렬한 성토 일색인 언론보도와 달리 이들 전문가의 의견은 무지개의 천연색처럼 다양했다. ‘오프 더 레코드’(off-the-record)를 요구할 필요 없이 맘 푹 놓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친구들의 색깔은 너무 확연한 대조를 이루었다. 탈색, 변색되지 않은 심중을 드러냈다.
역사 인식에 따라,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은 맨 오른쪽에서 자유주의적 사관이 농후한 맨 왼쪽까지 스펙트럼을 이뤘다. 맨 오른쪽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강경 대처하는 길 외엔 달리 방도가 없다는 시각이다. 이번에 우물쭈물하면 중국의 계략에 말려들어 우리의 소중한 고대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국충정’이 섞여 있었다. 일본이 독도에 침을 흘리며 심심하면 시비를 거는데도 본 떼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울분도 스며 있었다.
스펙트럼에서 약간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냉정한 역사보기’가 부각됐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안을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접근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한 친구는 역사는 고대사이든 현대사이든 한 민족에게 없어선 안될 뿌리이며 그 뿌리는 반드시 지켜야 하지만 울분을 터뜨리는 방식으로는 온전히 보전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스펙트럼에서 조금 더 왼쪽으로 가면 ‘역사의 정치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다가온다. 한 친구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역사를 역사로 보지 않고 정치적 대상으로 보고 있다며 이러한 자세로는 쟁점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한반도가 통일된 후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영유권’이 불쑥 제기되거나 조선족과 통일 한반도와의 유대 강화 가능성을 고려해 중국이 예방차원에서 선수를 치는 것도 못마땅하지만, 이를 한국 정부가 주도권 다툼의 형국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도 온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정부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면 실타래는 뒤엉켜 풀기 힘들어질 뿐 아니라 양국간 갈등이 다른 주요 현안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했다.
스펙트럼 맨 왼쪽에는 역사는 그저 역사로만 보자는 ‘순수 역사주의적 사고’가 있었다. 한 친구는 지금에 와서 우리가 그 옛날 역사의 주인이라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 하고 반문했다. 특정 시대에 특정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고대사의 주인을 가리는 것보다 당시의 삶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고 이해하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견해였다.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4명의 ‘역사 전문가들’이 내놓은 이론은 작금의 국민정서를 고려할 때 공석에서 가감 없이 표출하기 쉽지 않은 과격함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시각이 충돌하는 논쟁은 건설적이다.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왜곡한다고 해서 국민 모두가 국수주의적 역사관으로 똘똘 뭉칠 필요는 없다. 소수 의견이라고 해서 스펀지에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단선적 정치 캠페인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친구들의 의견이 공식석상에서도 당당히 개진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진지한 설전을 벌인 ‘맥주 집 역사토론회’가 언론에 고스란히 생중계 됐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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