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중앙은행 이사장은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인생살이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신효섭 기자〉
“약속 지켰더니 성공이 저절로”
한인사회에 중앙은행 이사장으로 잘 알려진 ‘뉴아트 인터내셔널’사 이정현 회장은 20여년이 넘게 미 주류시장에 인조손톱을 제조 및 판매하고 있는 기업인이다. 이 회장은 또한 중앙은행 이사장으로 14년째 일하고 있다. 기업인, 은행 이사장을 바쁘게 오가면서 오늘도 하루가 짧기만 한 이 회장의 원래 꿈은 공업 경영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다. 40년 가까운 미국생활을 해오면서 이 회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 교수대신 기업인
그는 지난 1968년 5월, 유학생으로 LA에 첫 발을 내디뎠다. 한양대 공업경영학과를 졸업하고 USC 공업경영학 대학원에 입학, 가족을 부양하면서 고생스러운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낮에 학교를 다니고 밤에 가디나 소재 오디오 카세트 제조회사 ‘오디오 매그네틱’사에서 공장근로자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시간당 임금 1.60달러를 받으면서 대학원 학비를 내고 생활비를 충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저임금을 받고 일하면서도 항상 연구하는 자세를 유지, 오디오 카세트 제조 공장의 공정을 유심히 살폈고 제조시간을 단축시키는 아이디어를 제시해 이 회사의 생산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그는 결국 2년 후 이 회사의 스폰서십으로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낮에 공부하고 밤에 공장 근로자로 일하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피로가 누적돼 자동차 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었다. 학위 취득 후 한국에 돌아가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려던 그의 꿈은 현실의 장벽에 막혔고 비즈니스를 경영하는 기업인으로 그는 변신했다.
그 당시 한창 붐을 이루던 가발가게 운영을 시작으로 그의 비즈니스 인생은 시작됐고 그후 속눈썹 도매상, 전기 퍼머기 판매 등을 거쳐 81년부터 인조손톱 제조 및 판매업체 ‘뉴아트 인터내셔널’사를 설립해 80년대 전성기에는 연간 매출액 2,000만달러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 끊임없는 변신
그는 69년 가발가게를 시작해 70년대 초반까지 가발 소매점을 4개까지 늘렸다. 당시 한국 가발은 미국에서 가발의 대중화 붐이 일어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원가 20달러 가발이 150달러에 판매될 정도로 이윤이 많았다. 그러나 한인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가격 덤핑바람이 불어 10년 가까이 끌 수 있었던 가발붐은 5~6년만에 끝나고 말았다.
그는 74년부터 그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 있었던 속눈썹으로 눈길을 돌렸고 속눈썹 시장의 유일한 한인 딜러로 자리를 잡으면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
7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펴는 기구 전기 퍼머기를 취급하기 시작해 대박을 터뜨렸다. 흑인들은 머리를 펴기 위해 찾았고 반면에 백인들은 고수머리를 만들려고 퍼머기를 이용했다.
컨테이너가 들어오는 날은 철야로 작업을 했고 나중에는 물건이 모자라 비행기로 실어올 정도였다. 5년 동안 수십만개의 전기 퍼머기를 팔았다.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기존의 제품과는 달리 고객들이 스스로 온도 조절을 가능토록 했다.
그는 80년대 초반 히피열풍이 사라지고 옷차림을 단정히 하는 정장 스타일의 분위기가 살아나면서 인조손톱에 착안했다. 손톱에 매니큐어를 일일이 칠하는 것보다 옷 색깔에 맞춰 손톱을 바꿔 끼면 편리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네일 살롱에서 손톱을 치장하는데 시간당 100~150달러가 들었지만 인조손톱을 개발해 가격을 20달러까지 낮추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한달에 1,500만개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연간 매출액이 1,500만~2,000만달러에 이르렀다. 현재는 연간 매출액이 500만달러 정도로 줄었지만 업계에서는 20여년이 넘게 인기 있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고수하고 있으며 KBS 방송, 이코노미스트, 살롱 잡지 등에서 그의 성공 스토리가 수 차례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서울올림픽 여자육상 3관왕에 오른 ‘트랙의 패션 모텔’ 그리피스 조이너가 뉴아트의 인조손톱을 사용할 정도로 유명했다.
■ 최장수 한인은행 이사장
83년 12월, 그는 한 한인은행 오피서의 권유로 은행 설립에 뛰어들게 되었다. 감독국은 당시 한인시장 규모가 적은 데다 경험 있는 행장이 없다는 것을 구실로 신설 은행 허가에 부정적인 자세를 보였지만 이 회장은 경험 있는 미국계 행장을 초대 행장으로 내정하는 등 강인한 의지로 감독국 설득에 성공, 천신만고 끝에 1986년 3월 자본금 420만달러를 모아 마침내 중앙은행이 문을 열게 되었다.
1986년 초대 중앙은행 이사장을 시작으로 1996년까지 10년 동안 이사장을 지낸 그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다시 중앙은행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은행의 규모가 시가총액 2억5,000만달러 달러 규모로 커진 만큼 이익환원에 신경 쓰고 있다”며 “은행 차원에서 재단을 설립한 후 원칙을 세워 체계적으로 은행의 순익을 커뮤니티에 지속적으로 환원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1.5세, 2세 오피서 등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힘써 이들에게 코리안 아메리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은 물론 미 주류은행과 경쟁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려고 한다.
■ 경영철학과 스타일
그는 사람의 인생은 약속으로 시작해서 약속으로 끝난다고 강조한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썼던 것을 기업인과 은행 이사장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한 소매업체에 모르고 원가이하의 가격을 약속했다가 나중에 이를 알았지만 손해를 감수하고 할 수 없이 싼 가격에 물건을 준 적이 있었다”며 “속사정을 안 소매업체들이 나중에는 가격을 약간 올려도 이해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비즈니스의 성공비결은 조급해하지 않고, 항상 연구하고 개선하려는 자세를 유지하고, 해당 업계의 전문가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