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당선작
화 해
안민하
오랫동안
쥐고 있던 삼실 하나
툭
끊었더니
이렇게 후련한 자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진물 되어 흐르던 상처 하나가
어느새
곰팡이 버섯처럼
음습한 생명이 되어
군락을 이루며 번식하는데
관용의 삽으로
뿌리째 썩 떠서
고랑 밖으로 올려 부치니
볕 좋은 마당에
봄날처럼 널어놓은 빨래 마냥
담박
까슬까슬 말라 버리는데
무엇이 건너지 못할 강인가
흘러흘러 가는 물이
여기서 만가고
저기서 합쳐지는데
손 내밀어
온기를 나눌 때까지는
무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마는
둥글어져
더 둥글어져
서슬이 무뎌지고
끝내는
처음 것도 없어져
모 없는 조약돌이
너도 되고 나도 되어
빈 그물만 건지다 만선의 기쁨
당선소감
그 새벽에 빈배를 밀어 바다에 띄우고 집어등 하나 없이 바람이 미는 대로 내 속의 깊은 목소리 하나가 잡아 이끄는 대로 먼 바다에 나갔습니다.
늘 빈 그물만 건져 올리다가 한날 아무 예감도 없이 만선의 기쁨을 만났습니다.
뱃전에 잘게 부서진 빛처럼 퍼덕이는 푸른 생선같이, 살아서 아름답고 또 살아서 눈물 도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분명 시에는 생명이 있어 맥박도 뛰고 따뜻한 온기도 있으며엷은 실핏줄까지도 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에 대한 열정도, 열심도 아직 부족하고 시의 흐름을 툭툭 틔워 나가는 힘도 미약한 저에게 지레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은 내 영혼의 정수리에 때마다 맑은 물을 부어 주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63년 부산 출생 ▲한국방송위원회 심의위원
▲중등학교 교사 ▲현 뉴욕 새언약교회 한글학교 교사
■가 작
동백꽃
최 필(캘리포니아)
차라리
몸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우러렀던 생각만큼
아, 등을 밝혀 흔들어도
닿지 못하는 길이 아득하여
떠돌다 바람모서리에 걸려
주저앉은 하늘이
푸르도록 수심만 치대고 있는
모년모월모일모시
삼동 그 깊은 밤을 무너뜨리던
눈발들의 횡포에도
보이지 않은 눈물로 발을 씻고
가지런히 햇살들 진설한 이른 아침도 모르게
해웃채로
쇠스랑 같은 세월에 떠메어질
상여로 걸어 들
세상을 억지로 받고
옷섶 다 헤어지도록 그리워했던
목숨을 놓고 가는
죄만은 숨길 수 없습니다.
■장려작
나의 고통, 다운로드 되다
크리스 한(애나하임)
무심코 킨 인생의 화면에
비바람, 먹구름이 몰려든다.
삭신은 저리고 쑤시고
허리는 끊어질 듯 삶을 감당 못할 때
화면 밑으로는 무서운 속도로
고통이 다운로드 되고
다급한 마음은 이리저리
커서를 옮겨 클릭 하지만
이미 오류가 발생한 신경조직은
끊임없이 고통의 전류만을 전할뿐이다.
‘당신의 인생은 너무 많은 슬픔과
아픔, 아쉬움으로 과부하가 걸렸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고통 없는 생은 없어
타이레놀, 아스피린을 침몰시키고 앙물지만
수련 덜 된 무사가 단말마를 내지르듯
시린 생은 고비마다 비명을 토해낸다.
세상 잠 든 밤이면
소금 친 치어처럼 고통은 꿈틀대고
고통을 화두로 잡은
생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인생은 삭제할 수 없고
전원을 끌 수 없습니다’.
대문 앞 상수리나무
변창하(뉴욕)
비바람 몰아치는 날
가지 많은 상수리나무
관절마다 뼈가 아픈지
파도의 몸부림으로 길길이
울음 운다 사정없이
능욕을 당하면서도
잔가지 하나 쉽게
포기하지 않고
시퍼런 바다로 출렁인다
어린 나이에 집 떠나
배경 없이 푸른 가슴하나로
당당히 일가를 이룬
자부심과 책임감 때문일까
숲을 등진 외로움에
목숨조차 가물거리던 시절
주술적 기도보다도
피 식지 않도록 마디마디
온몸으로 실뿌리 품어준
지열의 그 지순한 우정을 생각함일까
십여년 전 처음 내 집에 왔을 때
삐쩍 마르고 윤기 없는 몸이
언제 제 몫을 할 수 있을지
미덥지 못했는데
뿌리 깊어도 피할 수 없는
삶의 행간 곳곳에 박혀있는
버거운 상처에 대해
아무런 귀뜸도 일러주지 않았는데
생의 고비마다
희망으로 출렁이는 대문 앞
잎 푸른 상수리나무,
그 깨우침이 눈물겹습니다.
감기
김선진(조지아)
달의 이마를 짚어 봅니다 열꽃 핀 얼굴이 뜨겁습니다
언 떵 가슴에 귀를 대 봅니다 그리움으로 거친 숨소리
나무가 밤새 콜록거립니다 바람이 코를 훌쩍거립니다
얼음 밑의 강물도 목이 잔뜩 쉬어 노래를 멈췄습니다
새들은 어지러워 날개를 접고 하루종일 잠만 잡니다
저런 저런! 온 세상이 다 마법 같은 감기에 걸렸군요!
곰팡이 핀 기억을 꺼내 햇볕에 말리세요
어두운 한숨의 먼지는 툭툭 떨어내세요
메마른 가슴을 위해 꿈의 가습기를 트고
맑은 대화와 신선한 웃음을 많이 드세요
전염되기 쉬운 마음을 깨끗이 헹궈내고
슬픔으로 부은 목은 기도로 푹 감싸세요
생이 시리면 따뜻한 추억들을 덮으시고
진한 그리움 우려낸 생각차를 마시거나
아니면 눈물나게 뜨거운 사랑을 후루룩
괜찮아요 까짓
감기쯤이야 뭐
실컷 앓고 나면
봄이 와 있겠죠
여린 속살 가득
연두빛 물 오른
참 살만한 봄
마종기 (시인)
미국 전역에서 모인 많은 작품들을 읽으며 새삼 ‘시사랑’에 시간과 정력을 쏟는 한인들의 많은 것이 자랑스러웠다. 당선작 ‘화해’는 좋은 시가 되기에 필요한 뛰어난 비유나 상징의 깊은 맛이 적고 경구나 잠언 같은 설명투가 보이지만 허식의 많은 장식을 버리고 쉽고 솔직하게 다가오는 소재의 품격이 큰 호감을 가지게 했다. 가작인 동백꽃과 대문앞 상수리 나무의 시인들도 시인적 기질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고 표현기술도 많이 연마한 분인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러나 욕심을 자제하지 못해 시 전체가 산만한 느낌을 준 것이 흠이었다.
앞으로는 시 한편에서 남이 이르기 힘든 곳까지 한길로 깊이 파고드는 훈련을 하기 바란다.
이분들과 장려상에 오른 분들 또 뉴욕의 김종란, 캘리포니아의 조수니 등 많은 분들이 사실은 당선작과 끝까지 겨루었던 분이라는 것을 알리면서 앞으로의 부단한 정진을 다시 부탁 드린다.
시를 쓰고 생각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한 생애의 세상을 깊고 아름답고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가장 값진 시간인 것도 사실임을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심/사/평
한혜영(시인)
안민하 님의 ‘화해’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에서 먼저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랜 습작기간을 거친 듯, 적절한 은유를 통해 무리 없이 주제를 떠올리는 솜씨가 단연 돋보여 당선작으로 쉽게 결정했다.
가작으로 뽑은 두분 중에 최필님의 ‘동백꽃’은 자신의 몸을 동백꽃으로 아프게 치환하는 작품이다.
주제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데, 몇 군데 모호한 표현이 거슬렸다. 이런 것들이 보다 투명했더라면 시가 한결 깊어졌을 것 같다.
변창하 님의 ‘대문 앞 상수리나무’는 힘들었던 자신의 과거와 상수리나무와의 접목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여지나, 보다 긴장감이 필요할 듯 싶다. 간단한 구조에 평이한 문장이라면, 쉽게 읽히는 반면 깊은 울림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장려상의 크리스 한씨의 ‘나의 고통 다운로드 되다’는 시대성에 맞는 소재를 적절하게 선택했다.
너무 많은 것들로 인하여 과부하에 걸린 인생과 인터넷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럽고, 그것을 풀어내는 솜씨 또한 거침이 없다.
그러나 함께 투고한 시편들이 너무 산문으로 떨어져 있어 아쉽게 생각한다.
그밖에 김선진님의 ‘감기’를 장려상에 매긴다. 여러 작품을 투고했는데, 매 편마다 군더더기가 따라 붙은 것이 흠이었다. 그런 것들을 냉정하게 잘라내고 보았을 때, 앞으로 좋은 시를 쓸 것 같은 가능성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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