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데이 모닝 클럽
김선진
묘지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오랜 친구라도 된 듯 아픈 사연을…
산다는게 한갖 슬픈 꿈에 지나지 않는 거라는 삶의 허무감에서 벗어나는데도 오래 걸렸다
그녀의 웃음기 어린 농담이 우리 사이의 낯설음을 부드럽게 거둬내 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재영. 나이도 나와 동갑이었다. 이 곳을 사랑하고 나이가 같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그녀와 쉽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은 친밀감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쯤이었던가. 묘지에서 우연히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그 두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된 듯 아무 거리낌없이 자신의 아픈 사연을 내게 담담히 털어놓았다.
“미국에 오게 된 것도 또 생각지도 않게 미국 남자와 재혼을 하게 된 것도 다 운명인가 봐요. 전남편과 헤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다 버리고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나올 일도 없었을 거고, 이모님이 하시던 한국식당 일을 도와주다 손님으로 왔던 지금의 남편을 우연히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제 남편의 눈에 제가 죽은 전 부인을 닮았다고 보여지지만 않았어도 싫다는 사람에게 그렇게 간절히 매달리며 청혼을 하진 않았을 테니 결국 인생이란 보이지 않는 고리로 다 연결이 되어 운명이란 걸 만들어 가는 것 같아요. 첫 남편과 헤어진 이유요? 어쩌면 너무 사랑해서였는지도 몰라요. 그 사람은 제 오빠의 둘도 없는 친구였어요. 제가 중학생일 때 고등학생이었던 그 오빠는 매일 저희 집에서 살다시피 드나들며 저를 동생처럼 예뻐했었는데 그런 인연이 나중에 커서 결혼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우리 엄마는 사위를 얻은 게 아니라 아들을 하나 더 얻었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며 좋아하셨죠. 우린 정말 남남끼리 만난 부부가 아니라 마치 남매 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가끔 두려울 만큼 부러울 게 없었죠. 그런데 사람이 사는 일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거더군요. 아기가 태어나고 몇 달 지나지 않아서 머리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는데 난데없이 뇌종양이라는 거예요. 드라마나 영화 속의 얘기처럼 처음엔 실감이 나질 않아서 내가 죽게 되는 건가 그런 생각도 안 들고 슬픈 지도 몰랐어요. 다행히 어려운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확률상으로 봤을 때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운 좋게도 조금씩 회복이 되어갔죠. 죽을지도 모르는 아내에게 보여준 남편의 헌신적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로 지극했어요. 이 사람이 날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정말 가슴이 저리도록 눈물겨웠죠. 그러면서 속으로 이런 다짐을 했어요. 만약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사람이 어떤 일로 날 슬프게 해도 난 다 용서해 줄 거다 그래야 이 큰 빚을 갚는 거다. 무슨 예감이라도 하듯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차안에서 왜 그런 결심을 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1년 후에 정말 그럴 일이 생기고 말았죠. 같은 회사 신입사원이라는 어린 여자가 절 만나자더니 다짜고짜 하는 말이 그 사람과 자기는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니까 제가 물러나 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더군요. 그 사람의 아기를 가졌다고 그 애를 낳아 내 아이와 잘 키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물러나 달라고. 그 말이 뇌종양 선고보다 내겐 더 절망적이었어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 싶더군요. 그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남편은 그저 한번의 실수였다면서 용서해 달라고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울었죠. 확인을 하고 나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매달리는 남편을 매몰차게 내치고 모두가 말리는 이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이혼 안 해 주면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몇 번 큰 소동을 일으켰더니 울면서 결국 내 뜻을 따라주었죠. 그땐 왜 그렇게 지독하게 굴었는지 몰라요. 그렇다고 그 사람이 밉거나 원망스러웠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놓아주고 싶었어요. 짧은 몇 년이었지만 남들이 평생 받을 사랑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원 없이 받았으니 미련도 없었죠. 어리지만 나보다도 당차 보이던 그 여자가 아들을 낳은 후에 결국 남편은 정식으로 그 여자와 결혼식을 올렸죠. 그 결혼식이 있던 날, 난 이모님이 사시는 이 곳으로 가방 하나 들고 무작정 떠나왔어요.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죠. 그리고 무슨 인연인지 데이빗이라는 남자와 재혼을 해서 세상 떠난 그의 전 부인이 낳았던 딸을 내 딸처럼 키웠어요. 엄마 얼굴도 기억 못하는 그 아이는 나를 마치 제 친엄마가 살아온 것처럼 좋아하며 따랐죠. 두고 온 내 아이가 그리울수록 그 마음까지 보태 더 큰사랑을 쏟아 부어서 그런지 이젠 나도 그 애가 내 속으로 낳은 딸 같아요. 이름이 리사에요. 혼혈인데도 아빠를 많이 닮아서 보기엔 미국애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땐 앞니가 두 개나 빠진 꼬마였는데 이젠 키가 나보다 커요. 지금의 남편이요? 뜨거운 사랑으로 결혼한 사이는 아니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없었으면 리사와도 시어머니와도 인연이 닿지 않았을 테니 제겐 그것 때문에라도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죠. “
나와 같은 나이의 그녀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며 나는 내가 그녀보다 한참 철없이 어린 사람인 것 같았다. 크게 좋은 일도 없었지만 크게 불행한 일도 없이 아주 평범하게 이 나이까지 살아온 게 복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든 닥치면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게 운명인데, 운 좋게도 나는 험한 길을 피해왔고 운 나쁘게도 그녀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먼길을 헤쳐와야 했다. 가슴속의 아픔을 치료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나보다 더 상처가 많은 사람의 영혼과 마주보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가슴속에 담긴 아픔에 비하면 내 슬픔의 이유들은 불행이 아니라 그저 사소한 불평거리일 뿐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선뜻 자신의 가장 아픈 상처를 열어 보여준 재영은 내게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연히 묘지에서 알게 된 후 하경까지 어울려 우리 셋은 가끔씩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곤 했다. 특별한 공통점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함께 있으면 편하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었다.
5
붙임성 좋은 하경은 묘지에서 날 보면 멀리서도 “지은 언니!” 하며 반갑게 달려와 손을 맞잡곤 했다. 그 동안 혼자 외로워하며 사람의 온기가 많이 그리웠던 건 아닐까, 하경의 밝은 웃음 속으로 언뜻 스치는 쓸쓸한 그림자가 안쓰러워 보였다.
너무 어린 나이에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며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도 같고, 잘못 터졌으면 큰 스캔들이 되었을 법한 어떤 사람과의 사랑 때문에 많이 괴로웠던 것 같기도 했다. 하경 보다 더 이름 값이 대단한 그 사람을 지켜주기 위해서 떠나온 건지, 그 생활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충동적으로 떠나온 건지는 몰라도 그때 그녀에겐 모든 걸 버리고 멀리 떠나오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고 했다.
“한번은 죽으려고 약을 먹었던 적이 있어요. 매니저가 어떻게 입을 막았는지 신문에는 과도한 스케줄로 인한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고 기사가 실렸더군요. 그렇게 며칠 병원에 누워 내 자신을 돌아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고 싶진 않다고 결심했었죠. 가면을 벗고 이제 나 자신으로 돌아가자, 그런 생각을 했죠. 그래서 어느 날 그냥 모든 걸 다 버리고 여기로 떠나왔어요. 그런데 요즘은 가끔씩 내가 버리고 온 것들이 생각나기도 해요. 미련이나 후회는 아니고 나 역시 잘못한 게 많았다는 자기반성 같은 거죠. 처음엔 한국 사람만 봐도 고개를 숙이거나 피했어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봐 무서웠거든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에서 철저히 잊혀지고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안 그래요. 누가 날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뒤에서 수군거리거나, 다가와서 팬이었다며 반가워해도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어줄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갇혀 있던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는데 꽤 오래 시간이 걸렸지만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걸 떠나와서 얻었다고 생각해요. 우연히 길을 걷다 눈에 띄어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연예계 생활 내내 마치 난 줄에 매달린 인형 같았거든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손이 날 조종하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었죠. 돈과 명성을 얻었지만 내 나이에 누려야 할 많은 것들을 잃고 살았어요. 남들 눈에는 화려했지만 그때 난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 지금의 내가 좋아요. 지은 언니는 어때요? 왜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되었어요?”
언제부턴가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 질문을 오랜만에 받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내가 왜 여기 와 살게 되었더라.
“남편이 여기서 공부하던 유학생이었어. 방학 때 한국에 왔다가 누구 소개로 날 만났는데 결혼하자고 졸라대서 망설이지도 않고 결혼했지. 그래서 여기 왔고, 남편이 졸업하고 돌아갈까 했는데 둘 다 여기 생활이 더 좋아서 그냥 머무르자고 결정을 했어. 그 후로 10년째 여기서 고달픈 이민자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그게 다야. 다른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에 비하면 너무 시시하지?”
하경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런 평범함이 가장 좋은 거죠. 특별하게 빛나는 일이 있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그저 아무 일도 없는 게 행복이라는 걸 요즘에서야 느껴요.”
“나도 그래. 이제 철이 드나봐. 전에 깨닫지 못했던 걸 요즘에서야 조금 알 것 같아. 사실은 나 한동안 나 자신을 많이 괴롭혔어. 내가 지금 여기 떠나와 살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들, 더 크게 펼치지 못하는 꿈들, 그런 것들의 그림자를 쫓으며 혼자 마음을 앓았어. 여기 와서 내내 방송 일을 하느라 정신없이 살 때는 몰랐는데 멈춰 서서 뒤돌아볼 시간여유가 생기니까 어쩐지 그동안 잘못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거든. 이 길로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 때 다른 길로 갔으면 지금쯤 더 괜찮았을지 모르는데 그런 부질없는 후회들 말야. 그런데 이 묘지를 알게 된 후 어쩐지 내 자신과도 다시 화해를 한 느낌이야. 내가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기도 해.”
“그런 기분 나도 알 것 같아요. 그러고 보면 살면서 누구나 가끔씩은 몸살 앓듯 호되게 마음을 앓아보는 것도 필요하죠? 안 보이던 게 보이고 모르던 걸 알게 되기도 하니까요. 그건 그렇고 참 갑자기 지금 생각이 났는데, 전에 여기 자주 오는 한국 사람이 또 있다고 했던 말 혹시 기억나요?”
인연이 없었는지 그 사람과는 영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재영도 한번 본 적이 있다고 했고, 하경은 몇 번쯤 마주쳐서 눈인사를 나누기도 했다는 그 사람이 누군지 나는 가끔 궁금했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그 사람을 다른 곳에서 봤어요. 이름이 정아래요. 박정아. 나이는 나랑 동갑이고, 남편과 세탁소를 운영해요. 혹시 저 아래 새로 오픈한 BP 개스 스테이션 알아요? 거기 뒤쪽으로 보면 덩킨 도넛 가게도 있고 무슨 스테이크 하우스도 있는 작은 몰 있죠? 늘 다니던 곳이 문을 닫아서 거기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갔었는데 묘지에서 몇 번 마주쳤던 그 사람이더라구요. 언니도 세탁할 게 생기면 맡기러 가서 인사라도 나눠 봐요. 얌전하고 차분한 인상이 참 착해 보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러다가 우리 묘지에서 만난 여자들끼리 친목계라도 하나 만들게 되는 건 아닌가 몰라요.”
그날 하경의 농담에 그래볼까? 하며 웃을 때만 해도 머지않아 그 말이 진담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며칠 후 나는 남편의 겨울 양복 몇벌을 들고 하경이 말해준 그 세탁소를 찾아갔다. 미리 얘기를 들어서인지 카운터에서 옷을 받아드는 하경이 또래의 여자가 그 여자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상처받은 어린 짐승처럼 뭔가 아프고 애처로운 눈빛을 가진 여자구나, 내가 느낀 그녀의 첫인상은 그랬다.
“잘 아는 동생이 여기 세탁소가 좋다고 권해줘서 처음 왔어요. 혹시 아세요? 저 아래 묘지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 한 눈에 들어오게 예쁘고 키가 큰 여자.”
그녀가 마치 틀린 답을 말할까 걱정되는 학생처럼 조그맣고 짧게 대답했다.
“알아요. “
단답형의 대답에 대화가 끊어지자 좀 멋쩍어진 나는 수고하라는 인사를 남기며 돌아섰다. 막 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가녀린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날 불러 세웠다.
“그런데 저기요 혹시……”
“무슨 할 말이 있으세요?”
“혹시 라디오 하시던……”
그녀는 수줍은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했지만 자기가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니냐는 질문인 건 알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지은씨가 맞군요.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익어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는데, 정말 강지은씨세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어쩔 줄 모르고 반가워하자 내가 오히려 쑥스러워졌다.
“목소리를 못 듣게 돼서 제가 얼마나 서운했었는지 아세요? 하루종일 일하면서 라디오를 옆에 끼고 살았었는데 방송국이 없어지니까 한동안은 너무 허전해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우연히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가워요. 그 사람은 뭐할까, 가끔 안부가 궁금했어요. 사실은 제가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 방송국 말고 전에 일하시던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하실 때부터, 아주 오래 전부터요. 첫 방송을 하던 날, 마지막 방송을 하던 날까지 다 기억해요. 첫번째 방송국이 문 닫을 때 마지막으로 틀었던 노래가 해바라기의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도’였어요. 두번째 방송국에서 다시 방송을 시작하실 때 틀었던 첫 노래도 해바라기였어요. ‘사랑으로’ 맞죠? “
정답을 맞힌 아이처럼 자신 있고 씩씩해진 그녀의 말투와 표정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내가 모르는 그녀가 나를 알고 있다는 게 한편으론 쑥스러웠다.
다음 날 옷을 찾으러 간 내게 그녀는 작은 꾸러미와 빨간 선인장 화분을 내밀었다.
“꽃보다는 선인장을 더 좋아한 댔죠? 커피는 안 마시는 대신 녹차를 좋아하고 우울할 땐 아몬드 초컬릿을 몇 개 깨물어 먹는 버릇이 있고… 그 생각이 나기에 샀어요. 너무 부담스러워하진 마세요.”
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방송에서 지나가듯 했던 말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었다. 선물을 건네주는 그녀의 손이 나이에 비해 거칠어 보였다. 스쳐 가는 내 눈길을 느꼈는지 그녀가 손을 감추듯 얼른 내리며 부끄럽게 웃었다.
“세탁 일을 오래 하다보니 손이 이렇게 거칠어졌어요. 얼굴보다 손이 먼저 늙나봐요. “
며칠 후 아이와 함께 세탁소 근처의 덩킨 도넛 가게에 갔다가 다시 우연히 그녀와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고 나갔던 그녀가 뭔가 잊어버린 사람처럼 다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저기요…”
“말씀하세요.”
“괜찮으시면 전화번호를 알고 싶은데…”
“제 전화번호요?”
“그냥요… 괜찮으시면 가끔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실례인가요?”
나는 덩킨 도넛 이름이 새겨진 냅킨 위에다 내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주었다.
“정말 고마워요.”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수줍음이 마치 소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전화번호를 알려준 지 한 1주일쯤 지난 어느 초저녁,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남편은 밖에서 저녁 약속이 있어 아이와 둘이 평소보다 이른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였다.
“가족들이 있는 시간인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투는 언제나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거절 당할까봐 두렵거나 상처 받을까봐 잔뜩 겁 먹고 있는 사람 같았다.
“오늘은 남편이 저녁을 밖에서 먹고 늦게 와요. 아이는 TV를 보며 놀고 저는 지금 무지 한가하거든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전화 정말 잘 했어요.”
나는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사실은 오래 전에 제가 신세를 졌던 적이 있어요. 벌써 7년쯤 전의 일인데 여기 처음 와서 아는 사람도 없을 때 지은씨에게 전화해 하소연도 하고 많이 울기도 했었죠. 노래가 나가는 사이에 내 넋두리를 들어주느라 가끔 멘트도 없이 연이어 몇곡씩 노래를 틀기도 하셨어요. 오래 전이라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지만…”
물론 나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게 전화를 걸던 그 여자가 지금 나와 얘기하고 있는 정아라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건 전혀 몰랐지만 그 얘기를 듣는 순간 7년 전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방송 중에 노래가 나가는 사이 거의 매일 전화를 걸던 여자가 있었다. 남편에게 맞은 데가 아파요, 그러며 울던 여자.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한 집에 사는 시부모님들은 방문도 열어보지 않아요, 그러며 서럽게 울던 여자. 남편의 폭력과 시부모들의 냉대에 시달린다는 그 여자는 라디오에서 내 목소리를 들으며 유일하게 위안을 얻는다고 했었다.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된다는 그녀는 모든 게 낯설고 너무 외롭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애처롭고 가엾긴 했지만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방송 진행을 하다 말고 그 여자의 얘기만 한없이 들어줄 순 없어 매번 전화를 끊으며 난감했었다. 일 하시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또 전화를 걸어오곤 했었다. 주위에 아는 분들이나 상담센터 같은데 상의를 해보세요, 그렇게 조언을 했었던가. 조금만 더 참고 견뎌보세요, 무책임하게 그렇게 말했었던가.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전화가 오지 않았고 그 후 나도 정신없이 살아오며 그녀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기억 속의 그녀가 지금 나와 전화를 하는 사람이라니… 반가움보다 오래 전 그녀에게 마음의 빚이라도 졌던 사람처럼 미안한 마음이 먼저 앞섰다.
“그때, 많이 힘들어서 내게 전화를 했을 텐데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했어요.”
“아니에요. 그때 그렇게라도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아마 혼자 미쳐버렸을지도 몰라요. “
“지금은...”
아직도 맞고 사냐고, 지금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느냐고 물어보려다 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지금은 행복하세요?”
“지금은 그때보다 모든 게 좋아졌어요. 이젠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네요.”
“가끔 방송국으로 소포를 보냈어요. 책이나 CD, 예쁜 노트, 볼펜 그런 것들.”
“혹시 오징어와 솜사탕을 보낸 사람도?”
“그것도 저였어요. 엄마가 한국에서 부쳐주신 오징어가 너무 맛있기에 방송국으로 소포를 보낸 적이 있죠. 솜사탕은 언젠가 어렸을 때 달콤한 솜사탕을 먹으면서 참 행복했다는 얘기를 방송에서 듣고 생각이 나서 봉지에 든 걸 사서 보냈던 거고… 그렇게 라도 고마운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어요.”
정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한 건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했다. 4년을 넘게 사귀어온 남자의 가난과 자신의 가난이 너무 지겨워서 쳇바퀴 돌듯 이어질 그 운명을 벗어나고 싶어 모질게 사랑을 버렸다고 했다. 미국에서 세탁업을 크게 하고 돈도 많다는 지금의 남편을 친지에게서 소개 고 바로 결혼을 결심한 대가로 가족들을 셋방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떠나오며 그것만으로도 기뻤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미국에 와서 마주친 현실은 벗어나고 싶던 가난보다 더 무섭고 헤어날 수 없는 불행의 늪이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내가 벌써 세번째 결혼이었어요. 두 번 다 일년도 못 돼서 아이도 없이 파경을 맞았던 이유가 있었죠. 남편은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폭력적으로 변했거든요. 가끔 약에도 손을 댔고, 심각한 도박 중독에 빠져 있었죠. 나쁜 사람은 아닌데 삶에 대한 의지가 약한 사람이에요. 지금은 겨우 마음 잡고 열심히 살려고 애는 쓰지만 아직도 어딘가 불안정해요. 이민 와서 아침부터 밤까지 돈만 버느라 정신없던 부모와의 단절감, 말도 안 통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혼자 외톨이였던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었나봐요. 온 몸이 멍이 들게 날 때려놓고도 아침이면 울면서 빌었어요.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그런 그가 가여웠죠. 아니, 사실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어요. 가난이 지겹다는 핑계로 한 남자를 모질게 버린 죄 값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그저 참고 살았죠. 사는 게 지옥 같을수록 오래 전 그 사람이 더 생각났어요. 지금도 가끔 그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사는지 우연히 소식이라도 듣고 싶을 때가 있어요. 우습죠? 이제 다 지난 일을 부질없이 가슴에 끌어안고 사는 게…”
삼남매 중의 맏이라는 정아는 언니라는 말이 선뜻 안나온다며 망설이더니 몇 번의 전화 뒤엔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부르며 마음을 열고 내게 다가섰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게도 7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 정아와 나의 끊어졌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도 그 묘지를 통해서였다. Camel Road의 그 묘지는 낯선 곳에 와 혼자 사막을 건너는 낙타처럼 늘 외롭게 지내던 내가 누군가의 마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비로운 비밀 통로 같았다.
6
“우리 이럴 게 아니라 묘지에서 만난 인연으로 모임이라도 하나 정식으로 만들면 어때요?”
그 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연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묘하게 네 사람이 모두 비슷한 시간에 마주쳤던 날이었다. 넷이 나란히 앉아 오후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다 지나가듯 그 얘기를 불쑥 꺼낸 건 하경이었다.
“무슨 모임?” 재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한 달에 한번씩은 기본으로 만나서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만든다. 아니면 뭔가 기억에 남을만한 프로젝트를 하나 정한다. 뭐 어떤 거든지 함께 하는 모임.”
“괜찮은 생각인데 진짜 해볼까?”
내 동의에 이어 재영과 정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모임 이름을 정하고, 구체적으로 뭘 할지 모임의 성격도 정하는 거야. “
“묘지에서 만난 여자들. 이게 제일 어울리겠다.”
깔깔거리며 웃다가 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간 이름이 하나 있었다.
“지금 내가 어떤 이름을 생각했는데 다들 엉뚱하다고 웃지마.”
“뭔데요?” 하경은 내 입에서 무슨 이름이 나올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다.
“음, 난 말야 늘 똑같은 일상 속에서도 언제나 뭔가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 그런 의미에서 생각난 이름인데 Monday Morning Club이라는 이름 어때? 월요일 아침이 되면 나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해. 그래, 또 한 주를 기운 내서 살아보자. 또 시작이다. 지난 한 주의 피곤함과 우울을 다 떨쳐내고 또 새로운 시간 앞에서 삶에 대한 열정과 꿈을…”
내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하경을 시작으로 재영과 정아까지 손뼉을 치며 외쳤다.
“나, 그 이름 무조건 찬성!”
“나도.”
“나도.”
그렇게 해서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는 Monday Morning Club이 묘지에서 만난 우리들의 모임 이름으로 정해졌다. 그날 우리 넷은 어른들 몰래 철없는 음모를 꾸미며 재미있어 하는 어린 소녀들처럼 나이와 현실의 무게를 다 잊고 마냥 들뜨고 즐거웠었다. 마음속으로도 햇살이 스며드는 것처럼 따스했던 3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그 날의 특별한 느낌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날은 참 행복했어”라고 기억되는 날이란 게 살아가면서 그리 많은 건 아니니까.
혼자가 아니라는 든든함 때문인지 우리 넷의 일상엔 전보다 활기가 넘쳤다. 내 제안으로 함께 유명한 뮤지컬을 보러 가기도 하고, 하경의 제안으로 모두 몰려가 얼굴에 있는 잔 점을 뽑거나 헤어스타일을 파격적으로 바꿔보기도 하고, 정아의 제안으로 무슨 이름인가의 시민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고(부끄럽지만 완주를 못한 건 학교 다닐 때 체력장 점수가 형편없던 나뿐이었다), 재영의 제안으로 배추와 무를 박스로 사다 김장처럼 푸짐하게 김치를 담그고 그 김치가 익은 후엔 모여서 같이 김치 만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사소한 일상 속에 이렇게 많은 재미가 숨어 있어나 싶을 만큼 사는 재미가 넘치던 날들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낯선 별에 혼자 떨어진 사람들처럼 가슴 깊숙이 깊은 외로움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 마음 곁에 가까이 있다고 느끼자 우리들은 저마다 조금은 덜 외롭고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매달 첫번째 월요일은 우리 Monday Morning Club의 정기 모임날이었다.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인 200달러씩을 회비로 걷기로 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끼리 정한 이름으로 일명 Dream Project 1탄은 한달에 넷이 낸 돈 800불을 3개월 단위로 모아 한 사람씩 한국에 보내는 거였다. 그렇게 1년에 걸쳐 넷이 모두 한 번씩 한국에 다녀오고 그 다음에도 회비를 계속 모아서 넷이 함께 유럽여행을 떠나자는 게 Dream Project 2탄의 여행 계획이었다.
물론 한국으로의 여행에 가장 거부감을 보였던 건 하경이었다. 하지만 이젠 지난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우리의 충고에 오래 망설이던 하경도 생각을 바꿨다. 제비뽑기로 정한 순서는 하경, 정아, 재영 그리고 끝으로 나였다. 하경은 6년만에, 정아는 7년만에, 재영은 12년만에, 그리고 나는 10년만에 한국에 나가게 되는 거였다.
계속 일을 하며 아이를 낳아 키우고 정신없이 하루 한달 일년을 살다보니 10년 세월도 잠깐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에 나가지 못했다는 게 조금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정신없이 살다보면 한국에 한번 다녀오는 것도 생각처럼 쉽진 않은 게 이민생활이었다.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거나 둘 다 없거나 아니면 다른 무슨 이유든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이 늘 있게 마련이었다.
9월이 되었다. 우리 중에 처음으로 하경이 떠났다. 예정 기간은 2주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그 곳에서도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을 살 자신이 생겼다며 다시 일을 시작할 계획으로 뭔가 준비중이라고만 알려왔다. 멀리 떨어져 있음이 서운하긴 했지만 우리 셋은 그녀의 용기 있는 결정을 진심으로 기뻐해 줬다.
그리고 12월, 두번째로 정아가 한국으로 떠났다. 예정기간은 짧게 열흘이었다. 하지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건지 정아는 당분간 한국에 머무르겠다며 예정일을 한참 넘겨도 돌아오지 않았다. 재영과 나는 그녀의 돌출행동이 걱정스러웠지만 전화기 속의 정아 목소리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여기에서 보다 훨씬 밝고 행복하게 들렸다. 늘 상처받은 어린 짐승 같던 정아의 가슴속에 숨어살던 다른 여자가 갑자기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재영과 나는 진심으로 정아가 행복해지길 바랄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에 있으면서도 날짜에 맞춰 회비를 보내 왔고 전화도 자주 걸어왔다. 비록 둘씩 떨어져 있긴 했지만 우리들의 Monday Morning Club은 흩어지지 않고 건재하게 계속 이어져갔다.
3월, 세번째로 재영이 떠날 차례였다. 예정 기간은 2주일이었다. 그녀는 정확히 2주만에 돌아왔다. 떠날 때 공항에서 본 얼굴과 돌아올 때 마중을 나가서 본 재영의 얼굴 표정이 너무 달라 보였다. “한국물이 그렇게 좋은가? 2주 사이에 얼굴이 화사해져서 왔네.” 내 농담에 재영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재영이 떠날 때 혹시 그녀조차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던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그건 어떤 징크스 같은 걸 깼다는 안도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하경 그 다음엔 정아가 돌아오지 않자 마치 불길한 예감처럼 어쩌면 재영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했었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웃으며 돌아온 재영은 내 안도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한마디 말도 없이 먼 곳으로 영원히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재영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어 한동안 나는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망설이는 그녀에게 아픈 기억과 정면으로 맞서서 이기고 오라고 부추겼던 것을, 돌아온 그녀의 행복한 웃음 뒤에 감춰진 죽음의 그림자를 눈치채지 못했던 것을 자책했다. 그녀의 죽음에 방관자가 되어버린 내 자신이 참을 수 없이 밉고 싫었다.
“마음속에서 재영 언니를 편하게 보내요. 살아있는 게 더 행복하고 죽은 게 불행한 거라고 누가 그래요. 아무도 죽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거죠. 재영 언니가 그 곳에서 더 행복하길 바라주면 되는 거잖아요.”
하경과 정아는 전보다 자주 전화를 걸어 멀리서라도 날 위로해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 곳에 혼자 남겨진 나는 전보다 더 외롭고 쓸쓸해졌다. 살아있다는 게 그저 한갖 슬픈 꿈에 지나지 않는 거라는 삶의 허무감에서 벗어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7
그러는 사이 여름이 왔다. ‘떠나자, 아니 관두자.’ 하루에도 몇번씩 짐을 쌌다 풀던 나는 그저 서성거리기만 하다 결국은 떠나지 못했다. 재영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너무 컸던 터라 조금 더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쓸 곳을 잃은 내 몫의 회비로 나는 재영의 이름이 새겨진 돌의자를 마련해 줬다. 이제 더 이상 이 지상에서 아무 것도 필요 없는 그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쓸쓸한 날이면 나는 요즘도 혼자 묘지를 찾는다. 좋은 기억과 아픈 기억들이 뒤섞여 있는 그 곳을 나는 변함없이 사랑한다. 한참 생각에 잠겨 걷다가 지칠 때면 재영의 의자에 앉아 그녀와 얘기를 나눌 때도 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겠지만 그럴 때 정말 내 가슴 속 어디에선가는 재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지난번에 갖다 준 꽃 고마워. 향기가 정말 좋더라. 참,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서? 그래, 뭐든 하고 싶은 걸 해. 부디 지은씨는 늘 월요일 아침 같은 생을 살았으면 해. 오랜 가슴앓이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야지. 새로운 시작을 꿈꾸며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나가야 할 때야. 지금은 -
묘지에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걸까.
“무슨 잠을 이렇게 오래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누군가 어둠 속에서 날 부르고 있었다. 나는 흐릿한 빛이 스며드는 쪽으로 무거운 손을 내밀었다. 날 좀 일으켜줘. 이 심연의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나고 싶어. 오랫동안 감았던 눈을 이제 그만 뜨고 싶어.
깨질 듯이 아픈 관자놀이 근처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흐르는 건 피가 아니라 눈물,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솟는 뜨거운 눈물. 예리한 칼자국처럼 한 줄로 길게 그어진 눈물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눈물에 젖어 먹먹해진 귀를 비벼대자 내 안의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나는 이제 이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내 모든 슬픔과 아픔의 핑계로 삼는 일을 그만두려해. 내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때론 사는 일이 못 견디게 아프고 외롭다고 해도 그건 어딜 떠나서라든가 어디에 살아서는 아니라는 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기 때문이야.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먼 훗날 어느 곳으로 이어질지는 몰라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여기가 바로 내가 선택한 길이었어. 잠시 헤매거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때마다 내 등을 떠민 운명을 탓하며 원망했던 지난날은 참으로 어리석었어. 결국 내 안의 모든 괴로움은 다 내가 품은 어둠이었던 거야. 더 늦기 전에 내 안의 눈을 뜨고 저 먼 길의 끝을 바라보며 다시 걸어갈 거야 난…’ <끝>
(생활수기)
심사 : 송 상 옥
해마다 전국 각지에서 보내오는 많은 생활수기들에는 미주 지역 한인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정이 흠뻑 담기고, 심사하는 사람도 눈물이 날 정도의 애틋한 이야기, 또한 우리 이민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힐난하는가 하면, 속임수를 당한 데 대해 울분을 토로하는 글 등 다양하다. 그러나 속의 것을 그냥 쏟아내 놓는다고 해서 다 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읽는 이의 가슴을 치고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표현 능력이 있어야 하고, 쓰는 이의 혼과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며, 거기에 삶과 인생에 대한 안목과 생각의 깊이가 담겨져야 한다. 그것이 그 이전에 갖춰져야 할 모든 글다운 글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건이다. 전문적인 기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글을 쓰려면 적어도 그러한 자세는 지녀야 한다.
올해는 이것이다 하고 당선작을 내세우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그런 중에도 ‘나방이 퍼덕이는 이유는’(임희숙)과 ‘연이 이야기’(최문항) 두 편을 가작으로 내놓을 수 있었던 것으론 평년작은 된다. 거기에 ‘50년만에 불러본 어머님’(김예철)과 ‘바하마 유람선 가족여행’(신석호)을 장려상으로 뽑아 수확을 보탰다.
*가작 ‘나방이 퍼덕이는 이유는’: 부인이 쓴 남편의 이야기이며, 한 가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나서, 여러 어려움을 헤치고 뜻 있는 일 하며 살아가는 보통 이민의 한 시절을 담았다. 남몰래 하는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우면서도 ‘신앙 간증’같은 글로 흐르지 않아서 좋았다.
*가작 ‘연이 이야기’: ‘연이’라 이름 지은 개 사랑 이야기. 순종 진돗개를 미국에 번성시키라고 한국에 있는 친구가 진돗개 한 마리를 갖다 주었는데, 새끼를 낳게 하기는커녕 불임수술을 시키기에 이른 과정을 썼다. 식구처럼 돼버린 ‘연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기 위해서다. 친구는 노발대발하지만, 아내와 딸의 요구가 우선이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장려상 ‘50년만에 불러본 어머님’은 평양 봄 예술축제 스폰서 자격으로 입북한 세 남매가 50년만에 북의 어머니를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이산가족 상봉기’이고, ‘바하마 유람선 가족여행’은 제목 그대로 일가 친척 한 부대가 바하마에 여행 다녀온 이야기다. 두 필자 다 열심히 썼으나, 글을 다듬는 노력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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