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이 상을 혜주 너 혼자서 다 차렸단 말이야? 마치 요리책의 ‘손님상 차리기’ 코너를 옮겨놓은 듯한 혜주의 상차림에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아직 네가 시집을 갔다는 것조차 실감이 안 나는데...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다. 그녀는 엄마 치마 자락을 졸졸 따라 다니는 혜주의 세 살배기 딸을 눈앞에 보면서도 혜주가 아기엄마라는 사실이 영 믿기지 않았다. 하기야 그 아이가 고등학교 때 그녀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이후 대학생이 된 혜주를 잠시 보았을 뿐이니 딴은 그럴 만도 했다.
숙모, 이 도미찜 좀 드세요. 오늘 아침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한 걸 사온 거예요. 혜주는 제 부모도 제치고 굳이 그녀 앞으로 도미찜을 옮겨놓았다. 꼬리만 가지런히 다듬었을 뿐, 머리며 지느러미까지 제 모양 그대로 요리해 올라온 도미를 보자 그녀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어머, 네가 어떻게 이런 걸 다 만졌어? 너 고등학교 때까지 멸치대가리도 무서워 못 다듬었잖아. 멸치 얼굴이 자꾸만 자기를 쳐다본다고... 식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은 물론이고 혜주 자신도 양 볼을 붉히며 환하게 웃었다.
비록 7명의 시댁조카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유독 혜주에게만 정이 갔다. 이심전심인지 이번에 그녀가 10여 년만에 한국에 나오자 시댁식구 중 제일 먼저 제집으로 초청한 사람이 바로 혜주였다. 개인전 때문에 보름쯤 미리 나와있던 남편조차 그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초청을 받았다. 혜주의 간청에 결국 그들 부부는 그날 밤 그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숙모, 죄송해요. 저 숙모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남편들이 잠든 늦은 밤, 그녀가 막 혜주의 결혼앨범을 펴드는데 느닷없이 심각한 얼굴로 혜주가 운을 띄웠다.
죄송하긴 뭐가? 아하, 내가 앙증맞은 네 모습에 반해 작은아버지랑 결혼하게 된 것? 그녀가 가볍게 농을 하자 혜주도 이내 따라 웃었다.
1년을 넘게 만나면서도 그녀는 도무지 지금의 남편에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평소 그림을 좋아하던 그녀가 길을 지나다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처음 남편을 만났다.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함께 그룹전을 하고 있었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그녀의 뒤를 그가 무조건 따라왔다.
사람은 모진 구석이 없고 재능도 제법 있었지만 그는 전형적인 게으른 예술가였다. 생활이 무절제했고 무엇보다 생계능력이 모자랐다. 친구의 화실에서 미대 입시생들을 가르치며 받는 푼돈으로는 달랑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을 죽치는 데이트 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헤어지자는 소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경복궁으로 그녀를 불러냈다. 그러더니 경회루 연못 앞에 그녀를 세워놓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불과 10분 남짓이었지만 그녀는 힐끔힐끔 쳐다보는 행인들의 시선에 곧 짜증이 났다.
어진 중전마마가 왜 이러시나. 잔뜩 불어터진 그녀를 웃긴답시고 연못가를 깡충거리던 남편이 한순간 휘우뚱 연못 쪽으로 기울었다. 재빨리 팔을 잡아준 그녀 덕분에 그는 온몸이 풍덩 빠지는 수난은 면했지만 한쪽 발이 더러운 연못에 흠뻑 젖었다. 그때 화장실에 들어가 그의 냄새나는 양말을 빨아주면서 그녀는 자신의 혼란스런 감정에 찔끔 눈물이 났다.
그날 남편은 젖은 양말을 핑계로 경복궁에서 가까운 큰형 집으로 그녀를 불쑥 데려갔다. 당황한 그의 형수가 마실 걸 가지러 부엌에 들어간 사이 다섯 살 난 혜주가 수줍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날 그 아이가 입고 있던 빨강 원피스에는 노란 병아리 두 마리가 귀엽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래, 저렇게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가볍게 살지 뭐. 요렇게 예쁜 딸 낳고 말이야.’ 이윽고 그녀의 찬란한 고생길이 환하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숙모, 저 사실 미국에 다니러 가기 전까지는 왠지 숙모의 찌든 모습이 싫었어요. 저는 지금도 처음 숙모가 우리집에 인사 오셨을 때를 선명하게 기억해요. 그땐 모습이 참 고우셨죠. 아마 세상에 진짜 천사가 있다면 꼭 숙모같이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혼한 후로는 숙모 얼굴이 자꾸만 못쓰게 변했어요. 약간 사나와지는 듯도 했고요. 물론 술과 그림 밖에는 모르는 숙부 때문이라는 걸 저도 잘 알죠. 그런데도 왜 그런지 자꾸만 숙모한테 역정이 났어요. 숙부가 끝내 무명인 게 마치 숙모 탓이라도 되는 양 말이에요. 제게 그렇게 잘해주셨는데...
그랬다면 내가 미안하구나. 나이 어린 조카한테 어른다운 모습은 보이지 못하고... 그녀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혜주의 결혼사진으로 얼른 눈길을 떨궜다. 그러자 혜주가 앨범을 넘겨 맨 뒷장을 펼쳤다. 거기에 미화 100불 짜리 세 장이 나란히 끼워져 있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제가 대학교 때 한 달간 미국 숙모 집에 가 있었잖아요. 마지막 한국으로 떠나오는 날 숙모가 가게 카운터에서 제게 건네주신 거예요. 공항에 직접 못 데려다 줘 미안해 하시면서. 그때도 작은아버지는 무슨 그룹전인가 하신다고 한국에 나와 계셔서 숙모는 할 수없이 택시를 불러주셨지요.
그래, 그날 참 속상하더라. 네 숙부가 새삼 원망스럽고...
아니에요. 숙부가 계셔도 어차피 가게랑 집안 일이 온통 숙모 몫이잖아요. 그날 그 300불 뿌리치느라 오랜만에 잡아본 숙모의 손이 너무 거칠었어요. 그 까칠한 감촉 때문이지, 아니면 철없던 내 자신에 대한 회한 때문인지 아무튼지 비행기에서 내내 울고 왔어요. 죄송해요, 숙모.
이제야 우리 혜주가 결혼한 걸 실감하겠네. 그나저나 그 돈은 필요한 데 쓸것이지 뭐 하려고 이제껏 앨범에 끼어놓았어, 그것도 하필 결혼앨범에다가.
저도 살다보면 샛별아빠랑 힘들 때가 있지 않겠어요? 그때 숙모 떠올리며 참아보려고요. 참, 숙모 그거 아세요? 이번 첫 개인전의 주인공은 작은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숙모라는 것.
말을 마친 혜주가 그녀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순간 발그레하게 상기된 혜주의 얼굴 위로 그 옛날 빨강 원피스 계집아이의 모습이 살짝 포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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