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공항에서 딸 부부와 손자를 보자마자 심정만씨 부부는 장거리여행의 피로가 싹 가셨다. 그간 부쩍 커버린 손자녀석의 재롱에 눈 깜짝할 사이 딸네 집에 도착한 그들은 서둘러 짐을 풀었다. 사실 정만씨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 고추장, 된장에 온갖 밑반찬을 챙기던 아내와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였다. 공항에서 혹 창피라도 당할까 조바심을 쳤지만 막상 입맛을 다시며 좋아하는 딸을 보자 좀더 못 가져온 게 되려 후회가 되었다.
얘, 어떻게 네 고등학교 때 앨범이 아직 집에 있더라. 잘 챙겨놔라. 정만씨가 가방 바닥에 있던 앨범을 꺼내자 성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일부러 내가 집에 놓고 온 건데... 아버지도 참, 그 못난이 시절 사진을 뭐 하러 가져오세요. 마이클 아빠나 시댁식구가 보면 창피하게. 정만씨는 예상치 못한 딸의 핀잔에 머쓱해졌다.
결혼 5년만에 자신을 쏙 빼 닮은 성은이 태어나자 정만씨는 천하를 다 얻은 듯 기뻤다. 아이에게 오죽이나 애틋했으면 당시 그의 별명이 심봉사였을까.
그즈음 그는 7년 차 중고참 수학교사였다. 그간 나름대로 성실한 교사로 자부했지만 한 생명의 부모가 되어 바라보는 학생들은 전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굳이 모범생이 아닐지라도 한 아이 한 아이가 새삼 소중하게 보였다. 그들 또한 분명 누군가의 귀한 자식일 테니까.
성은은 부모의 기대만큼이나 잘 자라주었다. 건강했고 공부도 늘 상위권에 속했다. 게다가 원만한 성격 덕분에 그의 주위엔 언제나 친구들이 넘쳐 났다. 그 흔한 과외수업 한 번 받지 않고 성은이 무난히 대학에 진학하자 정만씨 부부는 이웃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성은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야학에 나가 봉사를 시작했다. 생계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놓친 소녀가장들을 모아 가르치는 곳이었다. 평소 외동딸 티 한 번 내지 않고 저보다 못한 친구들을 잘 보듬더니 그 따뜻한 성품이 급기야 야학으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았다.
정만씨는 성은이 야학을 마치고 늦게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지하철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성은아, 여기! 결혼 전 아내와 연애를 할 때도 이런 기분이었나? 계단을 올라오는 딸을 손짓해 부를 때마다 정만씨는 새삼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 마침내 곤해 보이는 성은이 개찰구를 빠져 나오면 부녀는 말없이 서로의 따뜻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보낸 3년간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4학년이 되면서부터 성은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취업준비를 핑계로 야학을 그만두었고 아비 보기엔 곱기만 한 눈에 굳이 성형수술을 받았다. 물론 기본적으로 그 아이의 사람됨을 믿었지만 정만씨는 딸의 그런 변화가 내심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실망쯤은 성은의 전격적인 결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성은은 졸업을 한달 앞두고 친구의 소개로 만난 재미동포 청년과 결혼을 시켜달라고 졸랐다. 다행히도 사윗감은 별로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금지옥엽 외동딸을 멀리 타국에 시집보낸다는 생각은 정만씨에게 서운함을 넘어 지독한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얘, 엊그제 연희가 집에 인사 왔더라. 요즘 너랑 통 연락이 안 된다면서 안부 좀 전해달라더라. 저녁식탁에서 한국의 이런저런 소식을 전하면서 그가 연희 얘기를 꺼냈다.
제가 언제 한가하게 편지할 틈이 있어야지요. 연희야 딸린 식구가 없으니까 저보다야 여유가 있잖아요. 그나저나 걔 아직도 야학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성은이 무심하게 말을 받았다.
연희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성은의 단짝친구다. 그는 성은과 같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 그녀와 함께 야학을 했고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그 일을 이어오고 있었다. 교사출신인 정만씨는 그런 연희가 늘 기특하고 예뻤다.
요사이 그곳 운영이 어려운 모양이더라. 젊은 학생들은 교재준비도 게을리 하고 그나마도 몇 달 하다가 그만두기 일쑤고... 그래서 요즘은 정년 퇴직한 전직교사들한테 도움을 구하고 다니나보더라. 내게도 부탁을 해 오길래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퇴직하신 지 얼마나 되셨다고 또 그런 일을 맡으세요. 그곳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데... 아비를 생각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한때나마 자신이 애정을 쏟았던 일을 그렇게 쉽게 말하는 딸이 정만씨는 야속했다.
첫 일주일이야 시차 적응하느라 그럭저럭 지나갔고 그후 두 세주는 딸 식구와 함께 몇 군데 관광을 다녔다. 그러나 어느 정도 효도관광을 끝냈다 싶자 성은은 제 어미와 쇼핑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랑 같이 나가셔도 괜히 피곤하시기만 할 거예요. 그냥 집에서 편하게 마이클이나 보고 계셔요. 넷이서 함께 다니는 게 번잡스러운지 성은은 걸핏하면 그에게 아이를 맡기고 제 어미랑 쇼핑을 나갔다.
세상에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살 게 많은지... 정만씨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딸의 세간이 이미 수준급이건만 무얼 그리 더 사다 나르는지 통 이해가 안 갔다. 사실 그 동안도 성은은 친정에 다니러올 때마다 빈 이민가방을 가져와 필요한 물건을 꽉꽉 챙겨갔었다.
오늘도 역시 쇼핑 나가는 두 모녀를 배웅하고 돌아서며 정만씨는 문득 오래 전 지하철역에서 마주쳤던 딸의 순수한 눈빛이 그리웠다. 이제 어디서 다시 그런 눈빛을 대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문득 연희의 고백이 떠올랐다. 직장일 끝내고 그 달동네까지 올라가면 솔직히 저도 힘이 들어요. 그래도 그네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 저도 모르게 피로가 싹 가시죠. 사실 그 애들은 낮에 저보다도 더 힘든 일을 했을 거예요.
‘그래, 몸으로 낳은 딸이 미국에, 가슴으로 낳은 딸들이 한국에 있다면 나는 얼마나 큰 부잔가?’ 모두가 내 딸, 심정만씨는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맑은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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