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국 <경제학 박사, 전 서강대 경상대학장 .포토맥, MD>
언더우드 가족이 오는 가을 한국을 떠난다고 한다. 1885년 고종 때 호래스 언더우드가 그리스도의 복음전도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온 후 4대째, 119년 만이다. 언더우드 가족은 경신 중고와 연희 학원을 건립하여 우리 나라 사교육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고 근대화에 공헌이 컸다. 그의 정동 집 사랑방에서 신자 14명으로 시작한 선교 사업은 새문안 교회를 발족시킨 원동력이 된다. 그의 전도 사업은 후에 ‘독립 협회’의 중요한 기둥이 된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에 서구식 자유주의를 주입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 활동을 북돋아 주었다. 그 동안 일청 전쟁, 일로 전쟁, 한일 합병,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해방, 북한 남침 등 허다한 세파를 겪고 고초를 감내하였다.
떠나신 님을 잡을 수도 없지만 어쩐지 서글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다.
나의 언더우드 가족과 처음 접촉은 책을 통해서이다. 1908년 호래스 G. 언더우드 박사는 ‘한국의 부름’( The Call of Korea)를 저작하여 그의 전도 사업의 여러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을 “오래된 ‘은자국’이 쇄국정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표현하고 조선의 국민 풍경을 문명의 공해에 아직 침식되지 않은 조선의 순수한 모습을 기술하였다. 그 책을 읽으면 마치 오래된 가족의 사진첩을 뒤적거리고 있는 느낌이 간다. 어떤 사진들은 좀 퇴색되어있고 어떤 사진들은 더욱 선명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다같이 가족들의 잃어버린 옛 추억을 상기시켜 주었고, 전체가 매혹적인 이야기와 아름다운 줄거리로 이어지고 있다. 호래스 언더우드 박사는 “내가 은자국에 가는 전도 사업가로서 선출된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고 자부하였고, “우리는 하느님의 교회가 무에서 시작하여 수만명의 신자의 교회로서 성장하였음을 보았다”고 그의 보람된 긍지를 말하였다.
이 책은 많은 예언적인 서술로 가득 차 있다. “즉 조선은 자원이 풍부하다. 그 넓은 국토의 규모에 좋은 정부와 적절한 조언자를 만나면 조선은 머지않아 부유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근대화 발전에 있어서 독자적인 사고 방식과 창의를 발휘하면 ‘은자의 나라’ 조선은 중국과 일본을 능가하고 말 것이다”는 등.
내가 책에서만 대하던 언더우드 가족의 한 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다. 그 당시 호래스 언더우드는 젊은 해군 장교로서 문리대에서 ‘고급 영작문’의 강의를 담당하고 있었고 후에 문리대 학생처장을 맡았다. 그의 강의는 학생들 간에 인기가 높아 넓은 북 강의실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차 있었다. 언더우드 교수는 강의 시작 종이 울리면 5분간은 잠자코 기다렸다 5분이 지나면 일절 입실을 금하였다. 그 당시 학생들 중에는 이 강의실 저 강의실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유행이었다. 언더우드 교수는 5분이 지난 후 입실을 하려는 학생에게 영어로 퇴장을 명하였다. 그러나 그 영어를 못 알아들은 학생은 아랑곳없이 그대로 들어왔다. 교수는 소리를 높여 “이 강의는 고급 영어반 입니다. 이 영어를 못 알아들으면서 어떻게 수강하겠다는 거요” 그래도 그 학생의 반응이 없자 그때는 유창한 우리말로 퇴장을 명하였다. 강의실은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그 다음 언더우드 가족 한 분을 만난 것은 1991년 8월 내가 코리아 해럴드의 outlook 칼럼과 코리아 타임스의 New Horizon에 기고한 논설 수필 132편을 모아 출판한 때였다. 뜻밖에 코리아 타임스에 서평을 발표한 분이 있었다. 알고 보니 서울 외국인 학교 교장 리차드 F. 언더우드 씨였다. 그는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논설, 수필집의 ‘책’ 이라기 보다 저자의 여러 사고를 정리 보관해둔 ‘서랍’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전체적으로 대단히 호감이 넘친 서평이어서 이 책의 인기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나는 외국인 학교를 심방하여 언더우드 교장에게 사의를 표하고 한국이 직면한 문제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하였다.
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위하여 심신을 바쳐 일하였다. 나는 그분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바친다. 그러나 언더우드 가족처럼 4대, 119년 동안 꾸준히 한국을 위하여 봉사한 가족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한국을 떠나는 원한강 한미 교육 위원회 위원장은 “떠난다 하더라도 우리 가족이 한국에 뿌린 보람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 이라고 말하였다. 언더우드 집안과 한국이 맺은 인연은 멀리 미국 플로리다 주와 태평양 건너 서울 양화진에 있는 그 가족 묘지 사이를 더욱 굳게 이어줄 것이다. ‘한국의 부름’(The Call of Korea) 이 소명한 사명은 완성이 됐습니다. 언더우드 가족들이여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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