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 초 워싱턴 DC에서 열린 레이건 장례식에서 조사를 한 인물 중 그와 가장 가까웠던 ‘정신적 동지’는 대처 전 영국 총리였다. 대처는 레이건을 “위대한 대통령, 위대한 미국인, 위대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대처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듯 싶다. 대처는 ‘영국 병’에 걸려 신음하던 영국을 유럽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활기 찬 나라로 만들어 놓은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레이건과 대처는 가정 환경이나 학벌, 정치 입문 과정은 달랐지만 집권한 후 편 정책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1981년 취임한 레이건 행정부의 성격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낸 사건으로 항공 관제사 대량 해고 를 꼽는다. 항공 관제사들이 법을 어기고 파업에 들어가자 레이건은 파업 가담자를 모두 해고해 버렸다. 정부 일각에서는 그랬다가 대형 사고가 나면 그 책임을 정부가 뒤집어쓴다며 타협론을 제시했으나 레이건은 이를 일축했다. 이를 군 출신 등으로 대체한 후 쫓겨난 관제사들의 재취업 요구에 끝까지 불응, 이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대처 총리도 집권기간 동안 가장 큰 정열을 쏟은 일이 광산 노조의 기세를 꺾은 것이다. 영국 탄광은 이미 경제성을 상실했음에도 탄광 노조는 일자리 보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일삼았다. “냉혹하다”느니 “철의 여인”이라느니 별별 소리를 다 들었지만 수년간의 투쟁 끝에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두 지도자가 노조의 굴복을 정책 우선 순위로 삼은 것이나 미국과 영국이 지난 20년 간 선진국 중 가장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나라고 노조는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의 권익 옹호를 명분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와 노조원들의 생명 연장이 유일한 관심사로 변질된다. 그 산업체가 국제 경쟁력이 있는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유 시장에서 생존 능력이 없는 사양 산업일수록 정치 투쟁으로 일자리를 보존하겠다는 아우성은 커진다.
그 과정에서 멍드는 것은 국가 경제지만 정치인들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조직력과 돈, 표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는 가장 덜 나쁜 제도일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파퓰리즘이란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다. 노조의 요구뿐만 아니라 사회 복지 예산을 늘리라는 사회 운동가의 압력부터 고속도로를 놔달라는 주민들의 요청, 일자리를 늘리라는 실업자들의 주장까지 벼라 별 소리가 다 나온다.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주겠다는 후보와의 경쟁에서 지고 들어주려면 세금을 올리거나 미래의 세금인 국채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세금이 올라가면 근로 의욕은 줄어들고 여유 자금은 생산활동에 투자되기보다는 세리의 눈에서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가려 하기 마련이다. 이를 막으려는 정부의 규제는 더 까다로워지고 이에 비례해 투자는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대처 이전의 영국이 바로 그랬지만 지금 한국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병원 파업으로 뇌일혈로 쓰러진 환자가 며칠째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1주일이 넘도록 협상이 타결되지 않고 있다. 은행에 가면 ‘투쟁으로 일자리를 지키자’는 은행 노조의 구호가 붙어 있고 학교에 가면 교원 노조의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이 정문 앞에 걸려 있다. 바야흐로 투쟁의 계절이다.
혹자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국도 많이 발전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미 유럽에서는 70년대에 이를 경험했다. 한국의 30대와 집권층 일부가 신봉하는 반미 자주화 또한 일본에서 70년대 유행하다 사라진 현상인데도 이들은 마치 첨단 이데올로기의 전파자인 양 의기양양하다.
생물학에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는 말이 있다. 배아의 복제 과정을 살펴보면 물고기의 아가미부터 포유류의 꼬리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밟아온 단계를 모두 거친 후에야 태아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30년 전 선진국이 경험했던 단계를 거쳐가는 중이다. “경험이란 학교는 비싼 수업료를 요구하지만 바보는 그곳 이외에서는 배우려 하지 않는다”던 프랭클린의 경구가 생각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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