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극본 김은숙ㆍ강은정 연출 신우철)이 초고속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방영 첫 주인 5ㆍ6일 26.7%(닐슨미디어리서치)로 MBC ‘불새’와 함께 단번에 시청률 1위에 오르더니, 3ㆍ4회가 방영된 12ㆍ13일에는 35.2%로 ‘마의 시청률인 30%’를 훌쩍 넘었다.
TNS 미디어 코리아리서치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04년까지 1~3회 사이에 시청률 30%를 넘긴 드라마는 MBC ‘나쁜 친구들’(2000년)과 KBS ‘제국의 아침’ ‘왕과 비’, SBS ‘명랑소녀 성공기’(2002년) 4편에 뿐이다. 도대체 ‘파리의 연인’의 어떤 마력이 시청자들을 이토록 사로잡고 있는 걸까?
▲ 가깝고도 먼 파리와 발리
재벌집 아들과 가난한 여자가 외국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되는 ‘파리의 연인’은 SBS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과 닮았다.
파리에서 고학하던 태영(김정은)이 가정부로 취직해 기주(박신양)을 만나고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나누게 되는 설정은, 발리 관광 가이드이던 수정(하지원)이 재벌집 막내아들 재민(조인성)과 만나게 되는 ‘발리…’를 연상시킨다.
태영과 수정의 발목을 잡는 게 각각 사고뭉치 작은 아버지와 오빠라는 것도, 신분이 천지 차이인 도련님 기주와 재민이 순수함과 동정이 뒤섞인 감정에서 출발해 이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런 판박이 설정에도 불구하고 ‘파리’와 ‘발리’의 분위기와 전략은 딴판이다. ‘발리’는 수정이 느끼는 갈등과 방황을 최대한 현실감 있게 표현하며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전복했고, 지고 지순한 사랑에 첨예한 신분 갈등과 끓어오르는 욕망을 주입시켜 비극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파리’는 기존 문법을 뒤집는 대신 촘촘하게 짠 이야기와 낭만적인 배경을 통해 로맨틱 멜로드라마의 정통 구조를 100% 충실하게 밀고 나간다. 심각하거나 우울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경쾌하고 발랄하지만, 이야기로 시청자들을 매혹한다.
▲ 신데렐라는 영원하다
태영이 겪는 모든 어려움은 기주 또는 수혁(이동건)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태영이 프랑스 사업가에게 ‘창녀’라는 소리를 듣거나 주스를 엎질러 봉변을 당하거나, 혹은 자동차 월부금을 갚지 못해 차압 당할 위기에 놓일 때마다 ‘왕자님’ 기주는 단번에 문제를 해결한다.
아무런 노력이나 고통 없이 약자에서 강자로 지위가 바뀌는 이 대목에서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게다가 기주가 해주지 못하는 세세한 보살핌, 이를테면 병 간호를 해준다든지 하는 일들은 수혁이 도맡는다.
태영은 ‘왕자님’뿐 아니라,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숨기고 ‘평민’인양 주위를 맴도는 반항아 수혁에게도 사랑받는 존재다. ‘파리의 연인’의 로맨스 판타지는 기존의 신데렐라 이야기보다 한층 증폭된다.
하지만 아무리 ‘신데렐라 이야기는 영원하다’는 명제가 유효하다 해도 김정은 박신양 이동건이 제각각 신데렐라, 왕자, 기사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면 ‘파리의 연인’은 상투적이거나 뻔한 멜로라는 한계를 시청자들에게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파리의 연인’은 어디까지나 김정은을 위한 드라마다. 분수대에 들어가 자신이 던졌던 동전을 도로 주으며 “너 이거 도로 압수야”를 외치는 김정은은 태영 그 자체다. ‘발리’에서 수정 역을 맡은 하지원이 악착스럽고 때론 뻔뻔한 가난한 여성의 모습을 그렸다면, ‘파리’에서 김정은은 가시라고는 단 한 개도 없는 장미처럼 귀엽고 발랄하다.
여기에 날카롭고 거만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따뜻하고 때론 어설프기도 한 기주를 연기하는 박신양과 기존의 질서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수혁 역을 맡은 이동건이 아울러 빛을 발하고 있다.
▲ 황금 시간대와 문제들
이런 미덕 말고도 ‘파리의 연인’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데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일요일 밤 10시는 KBS 2TV와 MBC가 시사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시간대로 드라마 시청자 층은 자연 SBS로 채널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KBS 1TV ‘무인시대’의 시청률 부진도 이 드라마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다.
그러나 ‘파리의 연인’이 계속 기록적인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갈 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상투적인 로멘틱 멜로드라마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언제까지 김정은 박신양의 ‘개인기’에 의존해서 비껴갈 수 있을까?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