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35주년 특별기획
못먹어서 난장이처럼 된 아이들
먹이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허기진 북한 3박4일’ 현지취재
묘향산 보현사에 야외학습을 나온 북한 중학생들. 상류층의 아이들로 보였으며 나이키 모자를 쓴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다.
평양 인근의 삼일포 식품 냉면공장. 이 곳에 설치된 기계는 한국산으로 월드비전이 전액 지원했다.
북한 채소온실 농장 관리인이 이 곳에서 딴 토마토를 든 채 월드비전 수경재배 기술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월드비전 만경대 채소온실 농장에서 북한 농업과학원 관리가 미주 방문자에게 오이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보통강에서 한 평양시민이 배를 타고 있다. 대동강의 지류로 강변에는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도 자주 보였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금단의 땅’으로 남아있는 북한으로 향하는 길이 쉽게 열린 것은 아니었다. 당초 4월24일 출발예정이었으나 이틀 앞선 22일 불의의 룡천역 사고가 터진 것이다. 북측의 요청으로 방문은 일주가 늦춰졌고 다시 “6-7월이나 돼야 할 것 같다”는 답변이 날라 왔다. “방북은 김정일 지도자가 초청한 것 말고는 확실한 게 없다”는 주위의 ‘농반 진반’에 반쯤 포기하던 상태에서 월드비전으로부터 급작스럽게 6월1일로 일정이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이번 방문에는 미주에서 본보와 라디오서울 기자 2명, 뉴욕의 월드비전 후원자 2명, 시애틀의 월드비전 관계자와 후원자 2명 등 모두 6명, 서울과 호주에서 오는 관계자와 기술 자문팀 4명 등 총 10명이 동행했다. 베이징에 집결한 일행은 북한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드디어 1일 평양발 고려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10명중 7명은 이미 여러 차례 북한을 다녀왔으며 초행은 기자를 포함한 뉴욕후원자 등 모두 3명. ‘경험자’와 ‘비경험자’의 차이라니, 초행길 3명의 얼굴에는 상기함이 역력한 반면 나머지의 모습에서는 마치 나들이라도 가는 듯한 여유마저 묻어났다. 평양으로 향하는 고려항공기는 좌석이 200여석 남짓으로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작았다. 평양-베이징 노선은 화, 토요일 일주에 단 2회 떠난다. 탑승객 대부분은 북한인 몇 명과 중국인, 아니면 유럽계였으며 개중에는 인도계도 눈에 띄었다. 2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보이는 러시아제 비행기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좌석 위 화물칸은 기차처럼 아예 뚜껑이 없었으며 앞의 좌석은 손으로 밀어보니 흔들흔들 움직이기까지 했다.
한산한 공항-호텔 간선 도로
민둥산 많아 썰렁한 느낌 더해
‘남남북녀’라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하나같이‘절세가인’인 여승무원들을 보는 즐거움은 긴장을 풀어주는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새빨간 유니폼에 김일성 배지를 단 승무원들은 남한 승무원에 비해 간단한 화장을 했으며 서비스에는 상냥함과 함께 사회주의 특유의 절도가 배어나왔다. 하지만 한 백인 탑승객이 멋모르고 카메라를 얼굴에 들이대자 여 승무원은 팔로 강하게 제지하기도 했다. 2시간이 채 못 되는 짧은 거리지만 점심식사가 제공됐다. LA의 한인 케이터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래스틱 박스에는 통조림 배와 복숭아, 닭찜, 계란말이, 빵, 샐러드 등 대여섯 가지 메뉴가 가지런히 담겨있었다.
항공기는 마침내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 곳은 미 중소도시의 공항처럼 비행기와 청사를 연결하는 통로가 없었으며 대신 트랩을 내려온 승객들을 소형 버스가 청사까지 실어 날랐다. 순안공항에 들어선 순간 인민복 차림의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가 약간은 긴장되고 주눅 들게 만들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 방북 때 TV로 보던 순안공항은 제법 그럴듯했던 것 같은데, 실제 본 청사는 매우 왜소했다.
공항 주차장에는 월드비전의 북측 파트너인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 관계자들이 마중 나왔다. 민경련은 그동안 월드비전과 함께 북한의 식량난 해결을 위한 대규모 씨감자 생산사업 등을 성공적으로 진행해 온 기관으로 이번 방문도 전적으로 민경련에 의해 이뤄졌다.
일행을 태운 일본산 중고 도요타 미니밴은 빠른 속도로 숙소인 ‘보통강려관’으로 질주했다. 잠시 차창으로 비춰지는 산야의 모습을 바라봤다. 민둥산이 많아선지 약간은 썰렁하고 을씨년 스럽다. 그나마 띄엄띄엄 ‘청년림’이라는 푯말이 붙은 곳에는 조림사업이 진행되는지 제법 나무들이 심어져있다. 숙소에 도착한 후 일행 중 한 명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놨다. 그는 공항서 호텔까지 도로를 주행하는 왕복 차량을 모두 세어봤다면서 “차량은 모두 53대, 이중에는 쉬고 있는 버스가 3대, 그리고 차의 핸들은 오른쪽 왼쪽 제각각이었으며 80%정도는 일본산”이라고 자신 있게 말해 그의 관찰력에 모든 일행이 혀를 내둘렀다.
보통강려관에서 첫 날 밤을 지낸 일행들의 일정은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첫 방문지는 역시 월드비전의 북한 돕기 역점 사업 중 하나인 채소시범 농장. 농장까지 가는 미니밴 안에서 마침 기술지원 멤버로 도움을 주는 남한측 교수로부터 북한 식량난에 대해 자세히 들어봤다. 그는 북한의 경우 △전반적으로 기후가 좋지 않다는 점 △인센티브가 없어 생산의지가 부족하다는 점 △농자재가 태부족인데 공급은 원활하지 못한 점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어느 새 일행이 당도한 곳은 평양 인근 만경대 협동 채소농장, 4,000여 농민의 삶의 터전이다. 월드비전은 이 곳에 수경재배 시범 온실을 설치했다. 크기는 약 1,000여평. 월드비전이 본격적인 채소 생산에 매달리게 된 것은 국수공장 사업 이후라고 한다. 국수공장 설립을 계기로 북한 돕기 사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자 극도의 영양부족 상태인 북한 어린이들과 노약자들에게 국수와 더불어 신선한 야채의 공급이 절실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월드비전이 채소 생산법으로 수경재배를 택한 이유는 일반 밭농사보다 양질의 채소를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 오랜 기간 농사만 지었지 비료는 제대로 주지 않아 땅이 척박, 지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병균의 침입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 채소농장에서 자란 오이나무 한 그루에는 보통 20-30개의 오이가 주렁주렁 열려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농장에서 먹은 오이만으로 일행 모두는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채소생산 온실은 월드비전의 땀의 결실이라 부를 만하다. 프로젝트를 세운 후 각종 물자는 남쪽의 인천항과 북쪽의 남포항을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제3국 국적 화물선을 이용해 보내고 이스라엘에서 산 비료와 호주에서 구입한 관수설비는 중국 대련에서 철도를 통해 북한에 보냈다고 하니 말이다.
농장에서의 한국, 호주의 기술진들과 북한 농민들의 만남은 작은 세미나를 방불케 했다. 농민들은 그동안의 작황 보고를 하고 문제점 등을 털어놨으며 기술진들은 조목조목 원인과 해결 방안을 제시해줬다.
농장원 4,000여명을 진두지휘한다는 여성 위원장은 남한 촌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외모였지만 억센 북한식 말투에는 강인함이 배어나왔다. 옆에 있던 북측 사람은 “이 려성위원장 동무가 지난 ‘모내기 전투’에서 1등을 먹어 로동신문에도 크게 났습네다”라며 추켜세웠다.
이 곳의 주작물은 오이. 약간의 병충해가 발견됐지만 큰 문제점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만경대 농장에서 정성껏 재배한 오이는 주변의 유치원과 탁아소, 평양의대 소아과 등에 분배된다고 했다. 하루 1톤의 오이로 여름 한철 약 33만명의 어린이가 매일 맛있는 오이냉국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던 오이가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라니 그저 놀랍기만 했다. 우리의 작은 정성이 큰 힘이 된다는 사실도 새삼 느껴진다.
월드비전 관계자들이 농장 방문시 빠트리지 않은 업무가 바로 채소와 농약 공급 상황 점검이다. 이 곳이 북한이라는 사실을 잊을만큼 꼼꼼한 체크 중간 중간에는 질책과 격려도 섞여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구호품”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북한의 수경재배가 어느 정도 본 궤도에 진입한데는 월드비전의 기술 자문역으로 애쓰고 있는 호주 한인교포가 큰 역할을 했다. 이 한인은 호주에서 굴지의 수경재배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자신의 비즈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시로 북한을 드나들며 헌신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이 후에는 한국의 교수 등 기술진이 함께 돕고 있다.
호주 한인 교포에게는 정말 ‘기막힌’ 일화가 전해져온다. 평소 애주가로 소문난 그는 어느 날 북한 인사들과 격의 없는 술자리를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술기운이 오르면서 그는 취중에 “에이, 금수산에 불벼락이나 떨어져라”고 했단다. 금수산은 ‘수령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곳. 아뿔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측 사람들은 쏜살같이 자리를 떴다. 며칠 만에 불쑥 나타난 북한 인사들 왈 “동무를 죽여야 할 지 살려야할지를 의논했수다. 이번 딱 한번 살려주기로 했으니 앞으로 말 조심하라우.”
오이 재배의 성공은 북한 측에 수경재배가 채소생산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는 것이 월드비전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는 북 고위급들이 자주 수경재배 농장을 찾는 데서도 짐작 할 수 있다.
만경대 농장에 이어서 두루섬 채소 생산온실도 방문했다. 이 곳은 지난 2001년 4-11월에만 오이와 토마토를 포함한 채소 180톤을 생산할 정도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곳이다. 농장 입구에는 150cm도 안돼 보이는 단신의 여군이 자신의 키만큼은 될 것 같은 긴 총을 메고 힘겹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북한에 와서 느낀 점은 사람들의 키가 확실히 작다는 것이었다. 묘향산에 들렀을 때는 학생들이 소풍을 나왔는데 잘해야 초등학교 3-4학년쯤으로 보였다. 하지만 옆에 있던 월드비전 관계자의 중2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북에 오기 전 귀가 따갑게 듣던 영양실조, 영양부족이란 단어가 정말 피부에 와 닿는 순간이었다.
평소 ‘친북’보다는 ‘반북’에 가까웠던 기자였지만 북녘 동포를 마주 대한 후의 생각은 이렇다. 이념과 관계없이 주민 개개인에게 직접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구호 방식이라면 민족적 동질성 회복을 위해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과 이는 용처를 알 수 없는 무조건적인 구호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호텔은 이미 ‘개방 완료’
객실마다 CNN·일본방송
“야 북한이 달라지긴 달라졌네.”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일행들이 호텔에 짐을 푼 후의 한결 같은 일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호텔의 객실에서 CNN이 버젓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CNN 뿐 아니다. 중국 스타TV, 일본 케이블채널 등에선 쉴 새 없이 자본주의사회의 연예, 오락 프로그램을 쏟아낸다.
첫 방북인 기자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으나 연 몇 차례씩 북한을 들락날락 하는 월드비전 관계자들에게는 분명 뉴스였나 보다. TV채널 수는 ‘조선중앙텔레비존’까지 합치면 10여개에 달했다. 북한에 가면 서방 세계의 소식과 단절될 것이라던 염려는 기우가 돼버렸다. 마침 스타TV에서는 한중합작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조선 중앙TV의 경우 ‘경애하는 령도자’에 충성을 맹세하는 프로그램이 주종이었지만 밤 10쯤에는 러시아 외화도 방영했다. 볼셰비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인데 외화 더빙이 덜 프로페셔널해서인지 입 모양과 대사는 따로 놀 때가 많았다.
호텔내 부대시설도 다양했다. 1층 로비에는 ‘은방울 커피점’이라는 카페가 있었으며 이 밖에 바와 가라오케, 선물점, 서점, 여성의류점도 들어섰다. 특히 커피점에서는 비엔나커피, 단설기(케익)는 물론 이딸리안 지짐(피자)까지 다양한 메뉴를 갖췄다.
모든 상점에서 미 달러화를 받는다는 것도 변화된 모습 중 하나. 지난해까지만 해도 유로화만 받아 방북 전 환전의 어려움이 있었다고. 1유로는 북한돈으로 150원, 1달러는 120원 정도. 참고로 보통강려관 커피샵의 주스나 커피 값은 미화 3-4달러정도.
이해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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