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국 <경제학 박사·전 서강대 경상대학장>
오래 동안 치매에 시달렸던 레이건 제40대 미국대통령이 지난 6일 93세에 영면하였다.
레이건은 1980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카터 대통령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알렌(Richard V. Allen)은 레이건 당선자의 국가안보담당 고문직으로 임명될 것이 확실시되었다.
어느날 알렌에게 카터 행정부의 머스키(Edmund S. Muskie) 국무장관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을 사형에 처할 가능성이 확실시 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머스키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불원 사임할 카터 행정부와 새로 들어올 레이건 행정부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렌은 여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이유는 다음해 1월 22일 레이건이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카터 행정부의 외교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정권인수단의 결의에 위반되기 때문이다. 머스키는 알렌의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대중은 천주교 신자이며 알렌 당신도 같은 천주교도입니다. 이대로 김대중의 사형을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라고 책망했다.
알렌은 김대중에 도움이 되는 방안을 꾸몄다. 어느 큰 신문의 기자로 하여금 그에게 김대중 사형 문제에 대해 질문하도록 했다. 이에 대답해 알렌은 익명으로 “만일 김대중을 사형에 처하게 되면 한국에 대단히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인사가 정권인수단의 누구라는 것을 알아내기는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으로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알렌은 1980년 11월 어느 날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조찬에 초청 받고 그의 집에 가보니 유병현 대장(합참의장, 후에 98년 주미한국대사)이 와 있었다. 조찬이 끝난 다음 유병현은 그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파견된 특사라고 소개하고 김대중 문제에 관해서 정권인수단과 알렌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알렌은 “당신이 전두환 대통령의 특사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일단 이대로 돌아가서 2주 후에 전 대통령의 특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명을 갖고 오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전 대통령의 특사라는 증명을 가지고 오도록 하라”고 대답했다.
알렌은 캘리포니아에서 쉬고 있는 레이건 당선자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훈령을 요청했다. 레이건은 알렌에게 이 문제에 관한 처리의 권한을 전적으로 부여했다. 여기서 레이건이 아랫사람을 신뢰하고 일의 처리를 허락하는 관인대도의 용인술을 볼 수 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알렌은 백악관 근처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김용식 주미한국대사와 손장래 공사, 정호용 대장의 방문을 받았다. 김 대사는 곧 자리를 비우고 정호용은 “김대중의 문제는 한국의 내부 문제이며 미국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자신의 내부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알렌은 즉각 “만일 당신네들이 이 일을 실행하고 김대중이 상처를 입게되면 ‘청천의 벽력’이 당신네들을 치게 될 것이요”라고 대답했다. 정은 대경실색하여 알렌의 말의 의미를 물었으나 알렌은 이에 대답하지 않고 정호용에게 “당신은 매우 강인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강인하지는 못할 것이오”라고 잘라 말했다.
다음 정호용은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에 전 대통령을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외국 원수는 초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국정부가 몰라서 한 요청이었다. 알렌은 관례상 취임식에 초청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취임식 이후 가까운 시일 안에 회견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전상 외국 원수가 워싱턴을 방문하면 직접 DC에 착륙하거나 버지니아 윌리엄스버그에 착륙을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전 대통령은 서울서 워싱턴으로 직접 오지 못하고 처음에 LA에 기착했다가 뉴욕을 거쳐 DC에 착륙하도록 했다. 국빈 만찬은 없고 오직 주찬이 있을 뿐이고 그것도 의전상 국빈 방문이 아닌 의전으로 하도록 했다. 그리고 자메이카의 국무총리가 전 대통령보다 앞서 레이건 대통령의 첫 번째 방문객이 되었다.
이러한 엄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일부 인사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 후 첫 백악관 방문객으로 전 대통령을 초청하여 전 대통령에게 권위를 부여했다고 비난한 것은 그 얼마나 허위날조인가.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에 기여한 것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나 김대중을 예정된 사형집행으로부터 구원하여 훗날 한국의 대통령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한 것은 가장 큰 공헌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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