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윤교수著 <민족통일의 꿈을 안고>라고 부제를 단 자서전의 표제다.
애국자 또는 올이 바른 지도자란 자신의 삶보다는 국가와 민중에 더 비중을 둔 이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최교수는 그런 인물이다.
해방 전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들은 조국 독립에 목을 매고 살았다. 노동하여 번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고 벽돌 한 장 위에 이름 남겨 총각으로 죽은 그들은, 지금 중가주의 위들리 다누바 묘지에 군번 없는 용사처럼 누워있다.
그들이 노동 이민의 시작이라면 최교수는 교육이민의 초기다. 그는 1938년 4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지나 로스앤젤레스 산페드로 항에 도착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4년 간 공부하고, 고국이 해방되자 1946년 서울로 돌아가 군정 공보부차장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한 2년 6개월, 시애틀에서의 3년을 뺀 56년의 세월을 버클리지역에서 지냈다.
버클리대학에서 일어강사이면서 한국어도 무료로 강의하기 시작했다. 1943년 그가 만든 한국어교제< Korean Reader>는 바침, 된소리글자, 회화, 명절소개, 역사, 이광수의 글, 이순신, 부록 한자까지 156페이지를 철판을 긁어 만들었다. 지금은 고어교과서처럼 되었지만 그분의 땀이 밴 사적 자료가 되었다.
그 뒤 Korea A History(1971), Korean in America(1979) 등 많은 저서를 발간 한국을 미국 사회에 알리는데 공헌했다. 초기 미주 동포들이 그랬듯이 그분도 조국 독립에 혼신 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 해방되자 군정과 서울대학 교수직을 털고 돌아온 것도 분단에 대한 실의 때문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민중주체 중립화통일론>을 책으로 발간했다. 그의 중립통일론은 이승만 정권시대 한국 정부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어 이 지역 초대 총영사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북한에서도 달갑지 않은 인사로 지목되었는데도 한반도분단과 독재체제에 대한 지원책임을 묻는 학문적 천적과 발언 때문에 미국정부의 기피인물(Persona Nongrata)이 되었다. 1950년대에 용공 내지는 공산주의자로 비 미국적 활동 위원회에 기소되어 10년 간 법정투쟁에서 복원되기도 했다. 미국 주류사회와 연관되어 편히 살 수 있는 위치임에도 역경의 길을 택한 것은 미주 동포들의 사명은 조국 통일에 있음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최교수는 한국통일 문제의 역사적 배경, 철학적 기초, 통일 쟁점에 대한 남북한 지도자의 입장 변천, 강대국들의 시각, 해외 동포들의 견해 등 다각적으로 통일문제를 살핀 <민족 통일운동사 1988>도 출간했다. 이민역사도 오래 전부터 정리 분석해왔다. 한인들이 민족 정체성을 갖고 자신을 발견하고 미국사회의 다원적 문화에 공헌하는 코리언이 되길 열망해왔다. 미국사회를 다민족 문화가 녹아 하나가 되는 멀팅 팟(용광료) 이라는 말을 그는 싫어한다. 각 민족이 다양한 색깔로 어울려 사는 <샐러드 볼> 문화라는 것이다.
199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헌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누명과 거부와 인격 모독을 당해온 지난날의 아픔이 복원되고 조국애의 깊이가 인정받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올해로 그분은 90세다. 태어난 평북 의주와 통일된 조국을 보고 싶은 기다림이 장수케 한 힘이 된 것 같다. 미국에서 64년 동안 살았지만 시민권자가 아니다.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임을 고집한다.
의식 있는 모임에서는 먼발치에서 그분을 보아왔다. 이민100년사를 정리하면서 최교수의 자료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금년 1월, 오클랜드 박물관에서 한인 이민 백년을 기리는 <한인사회의 발자취>를 전시하는 개회식에도 오셨다. 그리고 전시장 한 모퉁이에 필자를 소개하는 비디오가 전시됨도 축하해 주셨다.
백년사 원본을 들고 버클리 대학 뒷산, 최교수 댁을 찾아 나섰다. 1942년 버클리대학 강사로 취직되었을 때는 동양인이라고 방 한 칸 세주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기차 타고 출퇴근했다는 회고담은 격세지감이었다. 선배들의 그런 극복이 오늘 우리가 인종차별의 벽을 어느 정도 넘어 선 디딤돌이 된 게 아니겠는가.
여유가 되면 감수사례도 해야겠다고 말씀드리고 왔는데 그 후 연락을 받고 찾아간 날, 많은 필진이 거의 무보수로 참여한 게 아니냐면서 백년사 원본과 금일봉까지 내놓으셨다.
이 나이까지 살아 백년사를 보게되니 기쁘다. 한 분 한 분 정말 헌신했다.
글을 받아오면서 선생님의 칭찬이 담긴 성적표를 가슴에 안은 초등학생 기분이었다.
그분 살아 생전 통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떠도는 지친 영혼>들이 조국에 안주했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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