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얘가 자꾸 미끄러지는지 모르겠네!
나는 어린이 의자에서 솜사탕처럼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아기를 향해 근심스런 한 마디를 던져보았다. 늦되는 아이들이 있다는 주위 사람의 충고를 되새기며, 뱃속 저 밑에서 멀미처럼 휘돌리는 염려스러움을 소음들을 내심 고개 흔들어 지우려는 몸짓이기도 했다. 감기약 조차도 피해가며 조심조심 임신 열 달을 넘기고 별 탈 없이 태어난 둘째였다. 아홉 달이 넘어도 웬일인지 고개를 가누는 것이 힘겹고, 온몸에 힘이 없어 베개를 몇 개씩 괴어 주어야 겨우 앉는 모습이 몹시 걱정스러웠다. 이유식을 떠먹이다 몇번씩 흘러내리는 아기를 바로 안아 올리며 순한 아이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보문아, 힘차게 자라야 돼.
한 살 정기 검진에 갔을 때 소아과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신경외과 의사와 상담해 보라는 권고를 받았다. 정작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왜 그렇게 몸이 무거운지..
오클랜드 아동 종합병원을 들어가는 길 앞에는 화사한 봄꽃이 오는 이를 반겼다. 어두운 복도와 낯선 절차를 하느라고 허둥지둥 치마끈 풀린 여자처럼 달아 오르는 얼굴로 헤매였다, 신경외과 대합실에 아이를 보듬고 앉았다. 건너편에 앉아 칭얼되는 너댓 살짜리 여자아이의 얼굴을 무심코 바라다가 가슴이 그만 철렁했다. 아이의 왼쪽 눈두덩이 한쪽만 부풀어 오른듯이 눈은 짝재기에 입술이 앞으로 한 치는 튀어 나왔는데 침을 줄줄 흘리며 엄마 머리카락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히스파닠계인 듯한 엄마는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의 손을 부드럽게 머리에서 떼어 내렸다. 눈을 둘 곳이 없어 벽에 붙은 게시판만 읽고 또 읽으며 놀란 가슴을 달래는데 머리를 뒤로 묶은 간호원이 큰 소리로 보문이를 불렀다.
안내된 진료실에 앉아서 깊은 숨을 내쉬며 팔에 앉긴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보문의 시선은 눈 앞에 있는 엄마를 지나 먼 곳에 꽂혀있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눈매가 부드럽고 키가 큰 흑인 의사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자기 소개를 했다. 마주 앉은 닥터 알마틴이 묻는 대로 집안 내력이며 임신 과정, 출산 때 아이의 상태 등 그동안의 발달 과정을 법정에서 진술 하듯 입이 말라 가며 대답을 하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쳐 묻고 싶은 충동을 발꿈치로 꾹꾹 눌렀다.
도대체 우리 애가 어디가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무얼 잘못 했나요?
신체 검사를 하기위해 옷을 벗기는데 여느때 처럼 아이가 자지러지며 울기 시작 했다. 아이는 작은 변화에도 몹시 힘들어했다.
보문아, 괜찮아. 의사 선생님이 어디 아픈 데 없나 봐 주실거야.
진땀을 흘리며 아이를 달래는데, 닥터 알마틴이 조그만 구슬이 가득 들은 유리 병을 꺼내 보문을 얼러 주었다. 색색의 예쁜 구슬이 작은 쟁반 위에서 구르는 것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 보문이 눈물 젖은 얼굴로 까르르 웃는다. 다시 담아 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라 진지한 얼굴로 인형처럼 작고 통통한 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직이며 구슬을 유리병에 담아 넣는 것이 너무 귀여워 꼭 앉아 주고 싶었다. 신체 검사를 마치고 두툼한 안경 너머로 애써 웃으며 닥터 알마틴이 하던 말이 성난 벌처럼 귀를 맴돌아 어떻게 집을 찾아 왔는 지 모른다.
보문은 발육 지체아입니다. 근육에 힘이 없어서 올림픽 선수는 못되겠지만 걷고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인식 능력이 보이니 앞으로 가능성이 많이 보입니다. 혹시 다른 합병증이 있을 지 모르니까 몇 가지 검사를 해보도록 하지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움켜잡듯이 가능성이라는 말을 머리 속에서 뇌이고 또 뇌인다. 천근 만근 무거운 발육 지체란 진단의 늪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내게 남편은 참으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밤 잠 못자고 끙끙 거리는 모습이 보기에 안되었는지 저녁이면 보문을 씻기고 먹이는 일을 아무 말 없이 도와주고, 자신도 큰 충격이었을 텐데 여느때처럼 내가 못보는 삶의 측면을 지적해 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우리 삶은 흘러 가는 물인데 항상 평탄한 길만 고집 할 수는 없지않아? 가다 보면 큰 바위도 돌아 가야 하고 낭떠러지도 뛰어 내려야 하는데 어렵다고 물이 거꾸로 흐르지는 못하지. 우리 둘이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보문을 돌봐 주다 보면 거친 바위도 부드럽게 쓰다듬고 폭포 위로 무지개도 올리는 강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이 고난의 의미를 이해할 날이 올 거야. 피하지 말고 물 흐르듯 최선을 다해 보자
한 번 마음을 다잡고 부터는 어떻게하면 아이의 발육을 도와줄 수 있을까 만을 생각하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동부에서 이사온 지 얼마 안돼 모든 것이 낯설고 아는 사람도 적어 처음에는 막막하니 덤벼든 긴 도전의 시작이 두려웠다. 우연히 차에서 공영 라디오를 듣다가 장애인들을 옹호해 주는 주립기관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되어 동양인 정신 건강상담소를 찾아가 이네꼬라는 사회 복지관을 만나게 되었다. 키가 작달만하고 진지한 모습의 그녀는 대낮에도 어둡던 우리집 좁은 거실에 찾아와 상냥하게 웃으며 겁먹은 내 질문과 문득문득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오열을 다 들어 주었다.
이네꼬의 도움으로 부모와 영아 프로그램 (PIP)이라는 교육기관에 보문을 등록해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특수교육 교사, 언어 치료사, 직업 치료사, 정신상담 의사로 구성된 이 학교는 장애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의 교육까지도 맡아 해주는 총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아침이면 큰 아이를 유치원에 내려 놓고 보문이와 허둥지둥 학교에 간다. 음악에 맞춰 춤추고 노래하며 자연스럽게 공부 가르치는 방법도 배우고, 기겁을 하고 울어대는 보문을 대신해 열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가며 미술도 열심히 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장난감과 친절한 선생님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문은 죽자하고 엄마에게만 매달리며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를 않아 무척이나 안타깝더니, 서서히 노래 소리가 들리면 싱긋이 웃고 배밀이를 하며 조금씩 조금씩 주위 환경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우리 보문이 좀 보세요!
나는 눈물이 솓구쳐 주체하기 힘든 목소리로 방안에서 책을 보던 남편을 다급하게 불렀다. 뒤뚱뒤뚱 위태롭게 두서너 발작을 떼어 내 품에 안긴 보문의 얼굴이 올림픽 선수처럼 자랑스럽게 빛났다. 두살이 거의 되어 가는 무렵 소파를 붙잡고 일어나 가구를 의지해 조금씩 걷기 시작하더니 만 이십 팔 개월만에 드디어 혼자 발자욱을 떼어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큰 아이 때는 모든 것이 쉽게 빨리 지나버려 한 단계 한 단계 기억할 겨를이 없었는데, 보문은 텔레비젼의 느린 동작처럼 천천히 자라는 덕분에 한 발작 한 발작이 더욱 더 고맙고 귀하게 느껴졌다.
PIP에서는 귀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아이들의 갖가지 장애로 인해 내가 겪는 고통에 비해 몇 갑절이나 더 힘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남이 필요하다 싶으면 아낌없이 내어주는 관용에 설익은 자존심이 부끄러워 녹아 내림을 경험했다. 글로리아는 손녀가 척추 갈림증으로 삶의 기로를 헤맬 때, 딸은 마약 중독으로 길에서 살며 아기를 돌볼 처지가 못돼, 자기가 손녀를 거둬 키우는 씩씩한 할머니였다. 보문은 심한 알레르기로 먹는 음식이며 환경에 제한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충치로 수술을 하며 달걀 알레르기때문에 보통 마취제를 쓸 수가 없어 전신 마취를 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그녀는 넉넉지도 못한 주머니를 털어 도너츠를 한 상자 들고와, 수술실 앞에서 애닳아 하는 나를 지켜 주고, 고맙다는 인사에 손을 흔들며 돌아 서던 멋진 사람이었다.
다른 인종에 대한 편견도 서로 아이들을 돌봐주고, 함께 얼굴 맞대고 아픔과 속냇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 다 늦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 뇌경화로 발육이 더디고 말을 못하는
탓에 가슴에 멍이 드는 흑인 아줌마 리사는 항상 너털 웃음을 웃으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표정으로 자기 아들을 쳐다본다. 아들이 간질이 심해 하도 많은 약을 쓰다 보니 자기도 의사 뺨치는 간질약 도사가 되어 가끔 다른 부모의 상담역도 해주는 오지랍 넓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별의별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일주일에 두번, 하루 세 시간씩 웃고 울며 지내다 보니 서서히 찌그러진 기형의 얼굴 뒤에 가려진, 호수처럼 맑고 아름다운 영혼이 문득문득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뇌성 마비로 눈이 잘 안 보이고 안면 근육이 이완되어 얼굴이 쟁반만한 애론은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미소로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는 귀염둥이였다. 조그만 친절에도 온 마음을 열어 태초의 순수했던 우리의 본연을 돌아보게 하는 이 천사 같은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은 보문이 내게 준 많은 값진 선물이였다.
보문이 세살이 되며 정들었던 학교를 졸업하고, 집 주위의 알바니 학군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버클리 대학 학생촌에 자리잡은 알바니 유아원은 초라한 겉모습 보다는 놀이 시설이 좋고 헌신적인 스탶으로 이루어진 훌륭한 학교였다. 걷는 것이 힘이 없어서 주차장에서 교실까지 얼마 안되는 길을, 몇 발작 가다가는 주저 앉으며 태반은 안겨서 다녔지만 유독 가다가 멈추는 곳이 있었다. 학교 급식을 담당하는 서글서글한 요리사 아주머니, 조안이 부엌에서 안녕 보문! 오늘은 뭘 먹고 싶나. 하며 아무 것도 못 먹는 줄 알면서도 아는 척 해주는 것이 좋아서, 식당 문 앞에서 빙빙 돌다 들어 가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심한 알레르기때문에 유제품, 밀가루 음식, 달걀, 콩종류, 땅콩, 새우등을 못 먹어 집에서 항상 음식을 싸오는 보문을 안쓰러워 하며 방과 후에 조안은 가끔 사과를 건네 주기도 했다. 보문은 아직 말을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여간 해서는 남을 쳐다 보거나 아는 기색을 안하는 데 그 아주머니한테는 손을 흔들어 나도 괜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그녀의 다정함에 고마움을 전하곤 했다.
학교를 옮긴지 몇 달만에 학교촌에 구건물을 철거 하고 새로운 단지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워낙 알레르기가 심한 아이라 철거로 생기는 먼지를 마시고는 콧물이 수도물처럼 쏟아지고, 눈 흰자위가 붉게 충혈 되면서 눈두덩이 붓고 얼굴이 얼긋얼긋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알레르기 약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애를 졸립게만 만들어 멍한 얼굴로 울기만 하는 가여운 아이를 안아주며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화를 감당 하기가 힘들었다. 왜 우리 아이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건지 너무도 삶이 불공평한 것 같았다. 전생에 지은 죄를 갚느라고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보문처럼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레르기 전문의, 닥터 니켈슨은 오클랜드 아동 종합병원에서 이십 오년을 진료해 왔지만 보문처럼 심한 증세는 처음 본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공기 정화기를 학교에 설치하고 교실 창문을차단해 먼지가 보문이 생활하는 공간에 최소한으로 들어오도록 하라는 골자의 건의를 학교에 해주었다. 이주 만에 다시 학교에 아이를 보내 놓고 전화기 주위를 맴돌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시간도 못돼 다급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흔든다.
빨리 와 보세요. 보문이 천식을 시작 했어요!
미친 여자처럼 신발을 꿰어차고 학교로 뛰어가 보니 아이가 눈이 휑하니 쌕쌕 숨을 쉬며 창백한 얼굴로 소파에 누워 있었다. 응급실로 달려가 천식 개스약 치료를 받고 나서야 겨우 화색이 돌아 오는 놈을 앉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괜찮아, 보문아. 엄마가 지켜줄게.
그때부터 알바니 학군 특수교육부의 디렉터와 웃지 못할 싸움을 시작했다. 다른 학교로 옮겨 달라는 요청에 차일 피일 답을 안하더니 교실 안의 공기는공기 정화기가 작동을 해 깨끗하니까 주차장에서 교실까지만 소방수들이 쓰는 산소 마스크를 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답을 하는 것이었다. 소방소에 전화를 해서 물어 보니 25 파운드나 되는 무거운 산소 마스크를 어린 아이가 어떻게 쓰겠나며 나를 보고 농담을 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오랜 이민 생활 동안 힘든 일 일수록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로 힘없는 편에 서게 되는 뼈져린 경험을 이미 여러번 해 왔지만, 이번 만은 예의 바른 한국 여인네 역활에서 머무를 수가 없는 문제였다. 있는 용기 다 모아서 약속 없이는 면담을 할 수 없다는 비서에게 시간이 날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반나절을 기다려 디렉터와 만나 담판을 했다. 한 시간 너머의 논쟁 끝에 예의 정중하지만 마치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인근의 한 학교를 보여 주겠노라는 약속을 얻어냈다. 막상 약속 된 장소에 가보니 주로 시력 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거의 은퇴 할 나이가 된 것 같은 할머니 선생님이 보문이가 시력 장애로 인해 걷는 것에 지장을 받느냐고 묻는데 더 볼 것도 없어 돌아 왔다. 친구를 통해 소개를 받았지만 그동안 망설였던 장애 권익 법률 사무소에 전화를 해서 변호사와 의논을 했다. 변호사와 합의해 편지를 보낸 지 이틀 만에 학교 측으로 부터 어디든지 우리가 원하는 학교로 보문을 보내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소문 끝에 인근 엘세리토에 있는 특수학교에 보문을 전학 시키고 한숨을 돌리는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 때문이었던지 오른쪽 어깨가 아파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기가 힘들어 지압 치료를 받으며 겨우 지탱을 하고 다녔다. 보문은 네 살이 되었는 데도 계속 걷기를 싫어 해서 주로 안고 다녔는데 원래 시원치 않았던 내 허리가 아프기 시작 하더니 손목의 인대가 상해 아침이면 이를 닦다가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기가 일쑤였다. 보다 못해 남편이 보문을 데리고 집 앞으로 나가 걷는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땅에 주저 앉으며 우리 보고 안아 달라고 울더니 조금씩 조금씩 걷는 거리가 길어져 한 달 후에는 집 주위를 한 바퀴씩 돌고 올 수 있을 만큼 다리에 힘도 생기고 자신감도 키워 갔다.
보문은 날이 갈 수록 얼굴이 똘망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말은 잘 못하고 알레르기로 고생은 했지만 점점 책, 동물, 컴퓨터등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무엇보다 행복하게 잘 웃어서 다행이었다. 우리 부부도 주말이면 부지런히 동물원이며 자연 박물관등 보문이 관심 있어 하고 교육이 될만한 곳을 찾아 다니며 지적인 자극을 주도록 노력을 했다. 서서히 글자에 눈이 틔어 가는 모습이 기특해 열심히 책을 읽어 주고 알파벳 퍼즐을 함께 맞추며 오랫 만에 큰 걱정 없이 가족이 웃으며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큰딸아이, 보리가 어느새 훌쭉하니 커서 초등학교 삼학년이 되어 있었다. 고맙게도 별 탈 없이 잘 커줘 애틋하니 마음이 저려도 제대로 신경을 못 써주는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알바니에 있는 국민 학교로 보문이 다시 전학을 온 여름 뜻하지 않던 복병을 만났다. 밤에 잠을 자는데 이상하게 그렁그렁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옆에서 자고 있던 보문이 게거품을 물고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남편을 깨우고 경황이 없는 중에도 리사가 주문처럼 들려 주던 간질 대처 방법이 생각나 아이를 옆으로 누여 기도가 열리도록 하고 911에 전화를 걸었다. 악몽 처럼 병원 응급실에서 밤을 새우고 보문은 간질병이라는 혹을 하나 더 달게 되었다. 부작용이 심한 약과 수없는 검사 때문에 겪은 일들을 이야기 하려면 책을 한 권 써야 할 만큼 마음고생을 했지만, 이제는 이골이 나서 약을 과자 주듯이 보문아 약 먹자하고 무심하게 먹일만큼 신경이 단단해졌다.
병원을 들락거리며 검사를 하던 중 아동 발달 부서에 새로 온, 닥터 와크텔을 만나게 되었다. 연래행사처럼 하는 발달 진단검사 였는데 뜻밖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자폐증 증세가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자세한 검사를 하도록
몇 주 후에 다른 의사와 함께 다시 만나자고 했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아 그냥 웃고 말았다. 자폐증 아이들은 무척 폭력 적이고 심한 경우에는 온 집안을 부수고 식구들을 다치게 한다고 들어왔기에 당치도 않은 이야기로만 들렸다. 보문은 정이 많고 성품이 온화하여 개미 한 마리도 다치게 할 아이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여 도서관에 가서 자폐증에 관한 책을 뒤지면서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보문이 어릴 때부터 사람을 잘 쳐다 보지 않고 큰 소리나 강한 햇빛에 겁을 내던 것이며, 집을 이사 했던 첫날밤 환경이 바뀌었다고 잠을 못 자고 막무가내로 울던 것이 다른 아이들의 실례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닌가! 자폐증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보문의 문제를 이해 할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에 반가웠다. 우선 자폐증 자체에 대해 그렇게 많은 책이 나와 있는 것이 놀라웠고, 병 자체가 스펙트럼이라 하여 심한 중증의 증세부터 가벼운 증세까지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측했던 대로 한달 뒤에 보문에게 자폐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시간이 점점 지나고 자폐증에 대한 지식이 넓어 질수록 병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단순히 보문 한 사람 뿐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가 함께 지고 가야 하는 무거운 멍에임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늘상 내년에는 조금 더 나아 지겠지, 숟가락질을 가르치면 언젠가는 혼자 가방을 챙겨 학교에 갈 수 있게 되겠지 하며 미래의 꿈을 키우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자폐증은 평생 발달장애로 그 희망을 갖는 것조차도 쉽게 허락을 해주지 않는 매정한 병이였다.
어릴 때는 아기니까 하며 넘어가 주던 일들이 보문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 하면서 서서히 현실을 일깨워 주는 따끔한 화살이 되어 쏟아 내리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보다 한 살이 더 많은 보문은 책상에 앉아 선생님을 따라 공부를 하는 것은 고사하고 소변 가리는 것도 힘들어 학교 생활의 반 이상은 화장실에서 보냈다. 그러면서도 실수가 빈번하여 어떤 때는 하루에 바지를 열 벌 이상 적셔도 겨우 반 나절 밖에 지나질 않아 허둥지둥 빨래를 하는 일이 많았다. 얼굴에 물닿는 것을 싫어해서 아침이면 세수를 시키고 이 닦이는 것 만으로도 진이 다 빠져 허덕이는 생활 속에 스물스물 짙은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금방 화장실에 데려 갔다가 젖은 바지를 벗기고 돌아 서서 보면, 똥을 싸서 떡칠을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앉아서 책만 열심히 보는 아이에게 차마 소리는 못지르고 내 가슴만 치면서 점점 절망의 늪 속으로 잠겨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가끔 방과 후에 다른 아이들이 자기 엄마한테 그날 하루 있던 일을 신나서 이야기하면 그 엄마는 대견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며 아이와 대화 나누는 것을 보면서 내게는 그런 단순한 기쁨조차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댔다. 아들을 나으면 함께 축구도 하고 태권도도 시키면서 듬실하게 커가는 아이와 삶에 대한 이야기로 밤도 새우고 좋아하는 책에 대해 토론하며 재미있게 살고 싶었는데..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 존재인데, 누구나 자식에게 가지는 소박한 꿈을 자폐증 아이를 가진 부모는 가질 수가 없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하루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조금이라도 아이가 생존 하는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시켜 부모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의 뒷가리를 하게 하는가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산다. 또 한가지 어려운 일은 아이들이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화가 나면 폭력을 써서 부모 형제에게 해를 주는 일이 흔하다는 사실이다. 폭력 자체도 큰 문제지만 말 못하는 자식에게 맞아야 하는 그 애닮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보문도 커가면서 화가 나면 물건을 막 던지고 방향도 없이 뛰어 나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잘 웃고 마음 따뜻한 아이지만 속에서 솟아오르는 화를 주체할수 없는 것처럼 가끔 자신의 격정을 감당 못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보문을 끌어 안고 진정 시키며 그냥 낭떠러지가 있으면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에 몸을 떨었다. 지금은 엄마가 안아 주면 진정이 되지만 점점 커지면서 심해지면 어떻게 해야 되는건지 두려움이 눈을 가렸다. 누나를 좋아하면서도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으면 누나를 꼬집거나 밀치기 시작한 것도 이맘때 쯤이었다. 평소에 동생을 무척 귀여워 했던 보리지만 점점 자기 방으로 숨어 버리고 동생을 피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려니 기가 막혔다.
나는 밤이면 아무리 녹초가 되어 쓰러졌다가도 새벽 한 두시에 잠이 깨서 창문이 훤해 질 때까지 뒤척이며 이런저런 공상으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점점 어깨와 팔, 다리가 마비가 된 것처럼 저리고 감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척추 교정사에게 치료를 받고 침도 많이 맞았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이 심해지는 통증으로 애를 먹었다. 점점 짜증이 늘고 남편에게도 괜스레 화를 잘 내는 영 알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끔 집채만한 검은 물체에 눌려서 보문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기어가다 깨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어느날 우연히 장애 봉사기관 모임에서 정신과 상담 의사인 루시아를 만났다. 옛날 보문과 함께 다니던 부모 유아 프로그램에서 새로 장애진단을 받고 헤매는 부모들에게 단체 정신상담을 해주던 따뜻하고 이해심 깊은 사람이었다. 자기도 열 여섯 살의 장애아 딸을 키우는 엄마이기에 남의 아픔을 헤아리는 것도 무척 빨랐다. 어떻게 지내냐는 인사에 괜한 눈물이 나와 고개를 숙이고 대답을 못했더니 자기 진료실로 한 번 와보지 안겠느냐고 권고 했다. 망설이다 며칠 후에 찾아간 진료실에는 투명한 크리스탈이 조그만 실내 폭포의 흐르는 물소리와 어울려 차분한 경내를 연상케 했다. 엻은 하늘색 원피스가 곱게 보이는 루시아가 환한 얼굴로 다가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연해서 창밖의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며 반짝이는 햇빛을 사방으로 흩트리는 것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얼마를 침묵 속에 그렇게 앉아 있다 문득 올려다 본 루시아의 눈 속에는 아무 것도 헤아리지 않는 따듯함만이 비쳤다. 처음에는 드문드문 시작하던 이야기가 감정의 격랑을 타고 오열과 비통함의 폭풍우를 거세게 내리쳤다. 너무도 엄청나서 눈을 꼭 감으면 사라질 것처럼 보문의 장애를 부인하고, 조금만 열심히 하면 아이가 괜찮아 질거라며 자신을 채찍질 하던 허구며, 소홀히 했던 남편과 보리에 대한 죄책감, 내 자신의 무능함과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리는 시지프스의 운명처럼 너무도 벅찬 싸움에 대한 분노를 풍랑속에 던지듯이 모두 쏟아 부었다.
조용히 종이 휴지를 건낼뿐 아무 말 없이 모든 것을 다 듣고나서 루시아가 건넨 말은 부끄러워 앉아있는 내게는 뜻밖의 쓰다듬이었다. 영, 장애 부모의 삶은 정말 힘들어요. 나도 몇 번이나 죽을 생각도 해보고 영처럼 우울증으로 많이 아프기도 했어요. 우선 현실이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영의 짐이 덜어질 거예요. 그리고 나서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다 봐요. 나는 항상 가족에 대한 영의 끝없는 헌신에 존경심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이예요. 그리고는 Good Enough라는 화두를 지워 주었다. 힘들때 자신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만하면 잘 했어요하고 돌아 서란다. 그날밤 남편과 오랜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힘겨운 생활 속에서 쌓였던 서운함과 마음 아플새라 피하던 이야기를 모두 털어 놓으며 마음의 둑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후로도 우리 가족에게 어려움은 서로 시샘이라도 하듯이 쉴새없이 찾아 들었다. 보문은 여전히 알고 있는 지식도 남에게 표현하기가 힘들어 했다. 배가 고파요 소리를 할 수 있어도 그냥 울며 엄마가 자기 마음 읽어 주기만을 기다린다. 나는 갑자기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몇 달 고생을 하고 요즘도 한쪽 어깨가 저려 요가를 하며 겨우 버티지만, 어려울 때마다 오뚜기처럼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쳐 서로를 버팅겨 주며 지낸다. 자폐증 심리학자의 도움을 받아 보문이 화를 낼 때 너무 억제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미리 대처하는 법도 배웠다. 보리에게도 보문이 화를 낼때 자기를 보호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동생한테 화가 나면 엄마에게 아무리 나쁜 말이라도 다 할 수 있다고 허락 해 주었다. 속에 있던 답답함을 풀어낸 보리는 예전처럼 보문에게 노래도 해 주고 책도 읽어주어 누나를 우상처럼 좋아하는 보문을 행복하게 해준다.
남들이 보면 보문이 무척이나 힘든 짐처럼만 느껴지겠지만 실상 나는 보문을 통해 세상에서 쉽게 얻을수 없는 귀한 선물을 많이 받고 산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보문을 통해서 인연을 맺게 되었고,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상투적인 삶이 아니라 훨씬 깊은 사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장애나 가난이란 허름한 옷을 입고 살고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보문에게는 삶 자체가 진실이다. 재미있는 노래 한 귀절을 열 번, 백 번 되풀이 하면서도 한순간 한순간 그렇게 즐거워 할 수가 없다. 하하 웃으며 내게 달려와 안길 때는 온 몸이 기쁨과 하나가 되어 살아있는 따뜻한 에너지를 나눠준다. 어쩌다 건네는 말들은 원초의 말들과 같이 가식이나 계산이 전혀 없다. 얼마 전에 자기 선생님께 바로 눈맞춰 보지도 못하면서 등에 대고 당신은 좋은 선생님이예요라고 해서 감격한 선생님을 울린 적도 있었다.
어느 봄날 여느때처럼 보문을 뒷좌석에 앉히고 언어 치료를 위해 병원으로 허둥지둥 가던 길이었다. 길을 달리다 문득 아이가 궁금해 뒤돌아 보았는데 보문이 천상의 빛같은 환한 후광에 감싸여 동자처럼 앉아 있었다. 순간 가슴 속에 평온한 기쁨이 차오름을 느끼며 왜 보문이 내게 태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문은 내게 축복을 주기 위해서 온 경이로운 영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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