량기백 <전 의회도서관 한국어과장>
또 ‘시상’(詩想)이란 말이 있다. 곧 우러난 시 마음이다. ‘박지원 작품집’(1) 130쪽에 “시상이 없는 글이라면 그런 작가는 ‘시경’에서 보여주는 빛깔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사람으로서 이별을 겪어보지 못하고 그림으로써 먼 곳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과는 문장의 사연과 환경을 의논할 수 없을 거다. 벌레수염과 꽃술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글을 지을만한 생각이 결핍되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기량과 그 작용의 현상을 세심하게 따지지 않는 사람은 글자 한 자도 모른다고 해도 좋을 거다”라고 했다. 말할 것 없이 ‘한시’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시화’(詩話)란 말도 있다. 시에 관련된 잡기를 말한다. ‘청강시화’ ‘성수시화’ ‘제호시화’ ‘호곡시화’ 등이 있다. ‘시화’. 이 말은 시처럼 쓴 ‘이야기 줄거리’란 말이다. 곧 산문(Prose)체로 쓴 거다. Essay, 수필식 산문과는 다르다. 구태여 영어에 견준다면 Prosaic, Prose, Unpoetical, Unrhymed 이겠다. 또 ‘시화’를 여러 말로 부른다. 곧 기문, 기략, 기필, 난문, 담총, 만기, 만지, 만초, 문략, 별기, 비록, 설림, 소설, 쇄담, 수필, 신문, 야담, 야문, 야록, 야화, 야기, 어괴, 여화, 우담, 위담, 유설, 이림, 이찬, 잉언, 잠녹, 잠언, 잡기, 잡존, 잡지, 잡찬, 잡초, 잡편, 전문, 지림, 찬문, 척언, 청화, 총담, 총록, 총지, 총화, 췌언, 췌필, 패설, 필기, 필담 등이다. 참고로 적었을 뿐 별 뜻은 없다. 몰라도 좋다. 한문은 이렇게 한가지 말을 여러 갈래로 말할 수 있는 매력이 있어 시인을 포함해 우리 지성인들이 이에 매혹돼 한문에 사로잡혔던가 한다.
전형적 우리 시란 시조뿐이다. 가사(노래)도 있다. 가사란 또 시조다. 또 ‘담시’(이야기처럼 쓴 시)란 말이 있다. 시의 원형은 ‘서사시’(Epic)와 ‘서정시’(Lyric)라 한다. 서정시, 이는 김동진의 ‘가고파’ 또는 아일랜드 민요 ‘아 목동아’ 또는 찬송가처럼 노래(Music)로 이어진다. 이에 견줘 서사시, 이는 이야기 줄거리를 운과 음률이 있게 쓴 것이다. 이를 무대연극(Drama, Historic art, Ligit stage) 등 굿으로 알린다. 그리스의 Homer(850 B.C.), Aristoteles (384-322 B.C.), 그리고 Horace(20-13 B.C.) 등의 ‘Tragedy’(비극)와 ‘Comedy’(희극)이 서사시의 시작이라 한다. 그리고 이미 유럽 항간에 내려온 이야기 거리를 Shakespeare가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모아온 영어 사투리를 다듬어(윤색) ‘Romeo and Juliet’의 각본을 써 무대연극으로 알리고 퍼뜨려 오늘의 영어가 된 그런 서사시다. 우리도 우리 사투리로 한문말 투성이인 ‘심청전’ 그리고 ‘춘향전’을 우리말 서사시로 다듬어 연극으로 퍼뜨리면 우리말도 영어처럼 발달할 것만 같다.
매달 모이는 뉴욕 콜롬비아대학 한국세미나 1983년 11월18일 모임에서 코넬 대학(지금은 하바드 대학)의 David McCann 교수가 김소월(1902-1934)의 ‘진달래’로 세미나를 가졌는데 여기 토론자로 나온 하바드 대학 교수 Marshal Pihl(1998년 죽을 때 하바드 대학 한국학 교수)이 우리에게 큰(Prodigious) 가르침(Precept)을 안겨줬다. 그는 말하길 “시의 사명은 자기 고유한 말로 자기 고유한 삶(Tradition)을 읊는 것이고 그 것이 참 시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시론’(Poetics)을 들면서 소월의 ‘진달래’가 뛰어난 것은 자기 말인 순 한국말로 썼고 ‘Chinese’를 거의 안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은 한문말이 들어있다면 우리 시가 아니란 말이겠다. 말할 것 없이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도 우리말을 만들고 또 Pihl 교수가 말한 시인이 없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시론’으로 인식 안 된 느낌이 있다. 남의 나라 지성들이 우리 것을 보는 측면이 우리와는 다르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면 우리 시인의 사명이 크다 하겠다. Pihl의 Comment를 그대로 여기 옮긴다.
“It is significant that native Korean, not Chinese, dominates. The best access to native tradition is through one’s own language, which is the job of the poet, who tries to clarify language.”
2003년 어느 날로 기억하는데 이 곳 신문 워싱턴 포스트 스타일 섹션에 McCann 교수가 번역한 소월의 ‘진달래’를 알린 글이 실렸다. 미처 안 따둔 아쉬움이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