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데이빗 디체서군이 신부 오린이양을 업고 성혼행진을 하고 있다.
청사초롱 불밝혀라
활옷과 족두리로 단장하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은 신부는 아리따웠다. 사모관대를 갖춘 신랑 역시 한 여자가 눈 딱 감고 평생을 맡길 만큼 듬직해 보였다. 지난 주말 다이아몬드바에 위치한 오길평(62, 치과 의사), 인숙(62·주부) 씨 부부의 뒷마당에서 열린 큰딸 오린이(32·일러스트레이터)양과 데이빗 디체서(David DeChese· 37·디자인 회사 운영)의 전통 혼례식. 한국에서도 흔치 않은 전통 혼례 청첩장을 받아 든 하객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혼례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지난 주말 다이아몬드바에서 열린 한국식 전통혼례. 최근 전통혼례로 결혼예식을 올리는 젊은쌍들이 늘고 있다.
연지곤지 각시업고 사모관대 신랑 납신다
우리 조상들에게 있어 혼례의 의미는 ‘천지의 화합을 본받아 이성(二姓)이 호합(好合)하고 백년해로하며 위로 종묘를 섬기고 아래로 후손을 이어 효를 실천하는 것’에 있었다. 신랑 신부의 삶에 있어 혼례가 차지하는 중요성이야 어디 두말할 필요조차 있을까.
사극이나 영화에서도 수박 겉핥기로밖에 대하지 못하던 전통 혼례를 아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하객들은 뿌듯한 표정들이었다.
혼례복 디자인 하나에도 천지의 화합과 음양의 합일이라는 바람을 실은 우리 조상들은 혼례의 모든 순서에도 신혼부부의 화합과 자손만대로 이어지는 부귀영화의 소망을 담아냈다.
혼례 시작을 알리는 거례 선언에 이어 잔치 분위기를 띄우고 혼례가 신성하게 이뤄지길 기원하는 UCLA 풍물패의 앞 놀이마당이 벌어졌다. 본격적인 대례는 양가 어머니들이 청색과 홍색의 양초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늠름한 모습으로 등장한 신랑은 기러기를 전안상 위에 올려놓고 북쪽 하늘을 향해 4배를 올렸다. 기러기는 새끼를 많이 치고 정절을 지키는 새로 잘 알려져 있다.
전안례란 신랑이 신부에게 믿음과 정절을 기러기처럼 지키겠다는 약속이다. 생전 처음 해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랑 데이빗 디체서는 큰 절을 잘 해냈다.
신랑은 기러기아비가 들고 온 기러기를 장모에게 전달한 후 초례청의 왼쪽에 섰다. 청사초롱을 든 초롱동이가 길을 밝힌 가운데 꽃가마에서 내린 신부가 수줍은 듯 한삼 자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초례청으로 들어온다.
혼례에 임하기 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기 위한 상징으로 맑은 물에 손을 씻은 신랑 신부는 맞절로써 상대방에게 백년해로를 서약한다.
먼저 신부가 신랑에게 2배를 올리자 신랑이 신부에게 1배를 올리고 다시 신부가 신랑에게 2배를 올린다. “역시 우리나라는 남녀불평등 사회야” 라며 볼멘소리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짧아도 한참 짧은 생각.
신부가 2번, 신랑이 1번 절하는 것은 음, 양의 이치에 따라 음인 신부가 음수의 최소수인 2배를, 양인 신랑이 양수의 최소수인 1배를 하는 것이란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는 것은 그만큼 서로를 존경하겠다는 의미다.
이어지는 순서는 신랑과 신부가 천지신명께 하나 됨을 서약하는 합환주 의식. 표주박 잔을 들어 술을 반쯤 나누어 마신 다음 수모(혼례 도우미)에게 건네면 수모들은 표주박 잔을 청실홍실 사이로 교환해 신랑 신부에게 전해 준다. 원래 하나인데 둘로 나눠진 표주박 잔에 술을 나누어 마신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성스럽고 기쁜 혼례를 하늘과 만천하에 전하는 고천문 낭독 후에는 장모가 사위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각각 기러기를 전달하는 순서가 이어졌다. 기러기는 신랑, 신부의 변함없는 사랑과 두터운 부부금슬을 상징한다.
이제 부부가 된 신랑신부는 신부 부모님과 신랑 부모님, 그리고 하객들께 큰절을 올렸다. 이혼이 참 쉬운 게 요즘 세상이다. 이렇게 힘든 큰 절을 몇 번씩 해가며 힘겨운 혼례를 올렸으니 생활에서 부딪히는 작은 갈등쯤이야 뭐 그리 참아내기가 어려울까.
이날 축하마당은 김동석 교수와 UCLA 풍물패 그리고 한인 사회의 고전 무용단이 총 출연해 다채롭게 꾸며졌다.
흥이 난 하객들은 어깨춤을 추고 박수도 치며 이국땅에서의 전통 혼례를 만끽했다.
신부 오린이 양은 동생 오영이 양이 5년 전 전통 혼례를 올리는 것을 보고 오래 전부터 전통 혼례를 꿈꾸어왔다. 신랑 신부의 혼례복은 그녀의 이모가 자녀들을 시집 장가보내면서 마련해 두었던 것. 그 곱게 수놓은 옷을 이제껏 모두 4쌍이 입고 혼례를 치러 더욱 의미가 깊다.
신랑과 신부가 팔짱을 끼고 행진을 하는 것과는 달리 전통혼례에서는 신랑이 신부를 등에 업고 나간다. 앞으로 그녀가 맞이할 매운 시집살이를 잘 참고 견뎌달라는 부탁이었을까.
신랑 데이빗 디체서 씨는 건강한 신부를 업고 걷느라 숨이 가빠 하면서도 한국 전통 혼례의 깊은 의미와 상징에 대해 깊은 감동을 표현했다.
자리를 빼곡 채운 하객들 역시 마치 민속촌에라도 온 양 전통 혼례를 한껏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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