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요즘 은혜엄마 얼굴이 영 안됐네. 은혜할아버지는 나날이 혈색이 좋아지더구만. 이웃들은 내가 뒤늦게 깐깐한 시아버지 모시느라 고생한다는 표현을 그렇게들 했다.
그래도 함께 모시고 사니까 차라리 마음은 더 편해요. 이렇듯 솔직하게 속내를 들어내도 그들은 설마하니 그럴까 하는 표정들이다. 그러나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다.
애초 천성이 모질지 못한 나는 장남인 남편이 한국에 계신 부모님으로 편찮아 할 때마다 덩달아 죄인이 됐다. 그간 나름대로 명절이며 시부모님 생신 등을 깨나 성의 있게 챙겼지만 맏며느리가 어디 그 정도로 쉽게 면죄부를 살 수 있는가.
사실 10여 년 전 큰아이를 데리고 세 식구가 미국에 건너올 때만해도 이민은 꿈도 안 꾸었다. 3년 해외근무를 마치면 당연히 돌아가려니 했지. 그러나 어쩌다보니 이곳에서 둘째 아이도 낳고 또 영주권자도 되었다.
그래도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구도가 괜찮았다. 그러나 홀로 되신 시아버님을 아래동서가 모신 후로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었다.
남편은 서둘러 시민권을 취득하고 아버님을 모셔 오려했지만 그분은 아들의 권유를 귓등으로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완강하게 버티시던 그분이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나오셨다. 그분은 젊어서부터 골수 반공주의자시니까.
애초 단단히 각오는 했지만 막상 홀시아버지를 모시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정확히 새벽 5시 반이면 기상해 정한 시간에 꼭 아침식사를 하시니 내겐 주말 늦잠도 한낱 사치일 뿐이다. 그분은 반찬도 한끼에 결코 3가지를 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라, 어떻게 3가지 반찬만으로 3세대의 입맛을 골고루 다 맞춘단 말인가.
오후에 픽업을 가면 아이들은 툭하면 햄버거집이나 쇼핑몰에 가자고 졸랐다. 굳이 배가 고프거나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집에 일찍 가기가 싫은 듯 했다. 아이들은 엄격할뿐더러 일단 말이 잘 통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어려워했다.
아, 노인봉사회! 세상에 이런 복음도 있었네. 이웃 사는 윤정이 할머니의 권유로 아버님이 그곳에 정기적으로 나가시자 나도 한결 숨통이 트였다. 무엇보다도 아버님께 소일거리가 생겼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분은 봉사회 모임에 시큰둥하셨다. 윤정 할머니의 성화에 마지못해 끌려 다니실 뿐.
그러던 분이 언젠가부터 그곳에 재미를 붙이셨다. 표정이 부쩍 밝아지시고 잔소리도 눈에 띠게 줄었다. 남편과 나는 혹시 윤정 할머니랑 잘 되가는 게 아니냐며 지레 샴페인을 터뜨렸다.
어멈아,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여자 스카프 하나 사다 줄 수 있냐? 지난 발렌타인데이를 이틀 앞두고 그분은 수줍은 듯 내게 50불을 건넸다. 이제 아버님께 여자가 생긴 건 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돌이켜보니 처음부터 윤정 할머니도 아버님께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쇼핑 가는 길에 두 분을 노인아파트로 분가시키는 상상을 해보았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막상 다분히 윤정 할머니를 의식하며 고른 회색 스카프를 아버님께 건네자 의외로 반응이 뜨악했다. 이유인즉 색상이 너무 노티가 난다는 거였다. 다음날 밝은 보라색으로 바꿔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당신의 얼굴도 환해지셨다.
은혜엄마? 나야, 윤정이 할머니. 평소 애교 넘치는 그분이 그날은 영 심기 불편한 목소리였다. 글쎄, 이거 남의 일에 내가 공연히 나서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보기가 영 망측스러워서... 요즘 댁의 시아버지가 누구 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줄 알아? 낫살이나 먹은 양반이 며느리 또래 여자나 치근대고... 쯧쯧... 윤정 할머니는 말씀 중간 중간에 폭폭 한숨까지 쉬었다.
윤정 할머니와의 통화를 간추려보면, 아버님이 40대 중반의 파트타임 자원봉사자를 좋아한다는 거였다. 혼자 사는 간호사로 소문에 의하면 한국에 아들이 하나 있단다. 어쨌거나 우리 아버님이 당신의 훤칠한 외모와 언변으로 끈질기게 접근 중인데 그녀가 겉으로는 상냥하게 대하지만 속으로야 좀 괴롭겠냐는 거였다.
솔직히 그날 이후 남편과 나는 아버님과 눈을 마주치는 게 영 어색해졌다. 그러나 아버님은 마치 술에 취한 사람 마냥 그런 눈치쯤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또 몇 달이 흐른 오늘, 외출에서 막 돌아오자마자 불쑥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은 봉사회에서 아직 돌아오시지 않은 시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전화로 인사를 드리네요. 아버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효부시라고 얼마나 칭찬을 하시는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 좋은 일을 하시더군요.
뭐 별로 하는 것도 없는 걸요. 그나저나 아버님께서 이곳에 서류봉투를 놓고 가셔서 전화 드렸어요. 무슨 웰페어 서류 같은데... 걱정하실까봐서요.
어머나,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이런 말씀드려도 될런지... 혹여 우리아버님 때문에 너무 힘드신 건 아닌가 염려가 돼서요. 자식 입장에서 뭐라 말씀드리기도 뭣하고...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어요. 솔직히 처음엔 조금 당혹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분의 진심도 알게 됐고 무엇보다 아버님은 참 좋으신 분이세요. 저 역시 제가 다시 이성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갖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어요. 어쨌거나 지금은 조심스런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에요.
도대체 사람들은 이럴 때 무슨 말을 하나? 놀랍다고 하나, 아니면 고맙다고 하나. 내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잘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단지 허겁지겁 거실창문을 열고 가쁜 숨을 골랐을 뿐.
그런데, 잠깐! 저기 있던 장미송이들이 다 어디로 간 거지? 분명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활짝들 피었었는데... 담장 밑 장미나무엔 꽉 여문 푸른 봉오리들만 오롯이 남아 있었다.
오늘 아침 미처 배웅도 하기 전 서둘러 나가신 아버님, 그리고 사라진 장미송이들... 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꽃보다 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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