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영 <포리스트하이츠, MD>
신문지상을 통해 구상 시인의 귀천(歸天)소식을 접했다.
항상 소탈하고 격의 없는 대인관계로 그의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기 전에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미는 참으로 따뜻한 가슴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가 평소 존경하고 따랐다는 공초 오상순 선생의 추모회를 주관해온 일을 세상 사람들은 아마도 잘 모르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생전에 가족도 없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다 세상을 떠나신 공초 선생의 산소는 수유리에 자리 잡고 있다. 공초 선생의 추모회가 있는 날은 참으로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참여 해 구상 시인의 교류의 폭이 얼마나 넓은 가를 알 수 있었다.
한 시인으로서보다도 보스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곤 했다. 추모사업회를 조직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고 기금이 충분히 모금되어 기쁘다고 하던 모습이 이젠 한 폭의 수채화로 남아 있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공초 선생의 친척 되는 분들은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사회 저명인사들이 찾아오니 황송해서 손님접대도 제대로 못하고 구상 시인이 모든 사람들을 맞아서 그 일을 해마다 하던 일이 새롭게 생각난다.
안으로 발효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사람을 가리지 않게 했고 종교철학을 공부한 시인으로서 세속적 가치를 뛰어 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생애에 한 여백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 여백을 찾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인이라는 수사적 단어마저도 그에게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고 오직 존재에 대한 내면의 물음에 대하여 이것이 그 답이다 하듯이 세상을 향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명리의 허상을 일찍이 뛰어 넘어버림으로서 세속적 유혹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있었지 않았을까......
언제부턴가 문학도 하나의 세속적 벼슬로 착각을 하거나 자신을 치장하는 장식물이 되어버린 이때에 진정으로 참인간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실행함으로서 그런 시류에 대해 은유적 전범(典範)을 보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시인이란 틀에 메이지 않고 자신을 항상 검증하고 점검하는 고민을 통해 구도의 길을 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의 가슴에 새겨 놓았다.
우리나라에서 시 낭송회로서는 가장 오래되었다는 공간 낭송회의 창설 맴버이기도 해 성찬경 시인과 박희진 시인 등과 함께 후진들의 시작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일도 이젠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풍기는 외모는 사색적이고 외로운 학 같은 분위기지만 의외로 소탈한 성품이어서 많은 사람들을 주위에 모여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치 시골의 마음씨 좋은 농부가 텁텁한 막걸리를 한 잔 걸친 것처럼 특유의 허스키 목소리에 웃음을 담아 농을 쏟아 놓으면 좌중은 금방 웃음바다가 되곤 했던 일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른다.
공초 선생의 추모회를 마치고 몇 명의 일행들과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옮겨 간 적이 있었다. 몇 명의 여성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느닷없이 한 여성을 향하여 하는 말이 너무나 도발적이었다. 요즘 유행어로 한다면 엽기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허스키한 목소리에 혼자 헛웃음을 치더니 그 여성의 이름을 부르며 “그때 나랑 자놓고도 자꾸 안 잤다고 하는데 이제 나이도 들고 그랬으니 사실대로 고백해도 되지 않아?” 갑자기 이런 황당스러운 말을 하니 모두 감을 못 잡았지만 본인이 웃는 표정이니 그 웃음을 무슨 복선으로 이해라도 하는 듯 모두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그의 권위에 눌려 행동거지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건만 그런 황당무계하고 뇌락(磊落)스러운 말을 하니 그 조심스럽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어 편안한 자리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물론 그 당사자가 되는 분은 할머니가 다된 분이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듣자 얼굴이 붉어지며 내가 언제 선생님하고 같이 잤느냐고 시비를 벌여 그것이 또 하나의 웃음거리가 되어 그 날은 정말 너무 웃어 모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 할머니 설명으로는 한때 여당 대표를 지냈던 윤 아무개 선생과 김규식 선생의 비서를 지냈던 송 아무개 선생 등 몇 명이 모여 술을 마시다 밤이 늦어 함께 잠을 잤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할머니만 생존해 계시고 그분들 모두 다 하늘나라로 가시고 안 계신다) 그걸 가지고 자꾸 같이 잤다고 한다며 환장하겠다고 하던 모습. 노망이 들었다고 선생을 몰아세워도 그 특유의 웃음을 웃던 모습이 이제는 색이 바랜 한 컷의 사진으로 남아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 뒤로 더 이상 연결되지 못하는 필름이 되어......
그 날의 그 해장국과 막걸리가 너무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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