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지고…유쾌하고…만화같은 캐릭터 드라마 전면에
▲ KBS2 ‘백설공주’에서 마영희(김정화)는 사랑하는 진우를 붙잡기 위해 어울 리지도 않는 모델에 도전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오버’에 대한 정의.
1. 초과하거나 지나친 것. 2.상대편에게 자기 말이 끝났음을 알리는 말. 3.‘오버코트’의 준말.
그러나 조만간 ‘있는 그대로의 감정 표현을 심도있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일, 혹은 연기의 한 방식’이 추가될지 모르겠다. ‘오버 한다’는 말이 일반인에게나 배우에게 더 이상 욕으로만 들리지 않는 시절이다.
‘지나침이 모자란 것만 못하다(過猶不及)’는 선조들의 믿음은 유통기한이 지난듯 보인다. 이성을 앞세워야 할 정치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보이고, ‘너무 너무’라는 수식어가 ‘너무’ 자연스럽게 일상 대화에 쓰인다.
자신의 감정을 과장, 직설적으로 내뱉는 게 정답인, ‘표현하지 않는 것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시대다. ‘시대의 창’인 TV를 보면 그런 감정 과잉의 풍조를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에 금세 만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오버 캐릭터’들이 넘쳐 난다.
29일 SBS 수목드라마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극본 박연선, 연출 장기홍)의 녹화가 한창인 지난달 29일의 경기 고양시 일산 마두역 광장. 사극 ‘상도’에서 송도 제일 거상의 딸 ‘다녕’으로 지혜롭고 신중한 여성상을 보여줬던 김현주와 국민드라마 ‘대장금’에서 불의와 한치도 타협하지 않는 종사관을 연기한 지진희가 만났다.
▲ SBS 드라마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의 지진희와 김현주.
두 사람은 누가 더 오버하나 내기하기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뜬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튀어”라는 대사를 외친다.
‘미스김 꽃가게’를 털어먹고 노점에 차린 ‘미스김 생과일 사탕가게’마저 단속반에서 쫓기는 비극적인 장면에서 김현주와 지진희가 칼과 도마를 아이스박스에 챙겨넣고 포장마차를 끌고 도망가는 모습은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장된 동작을 닮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그동안 둘이 보여준 오버 연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 무열(지진희)은 은재의 부름을 받고 모텔방으로 들어갔다 수십개가 넘는 머리핀만 뽑아주고서는 “똥 밟았다”고 푸념하고, ‘술 먹고 토한 은재가 냄새가 나는 입을 들이밀며 키스해달라고 프로포즈를 했다’는 거짓말도 술술 지어낸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박 군’이라고 부르는 은재에게 분노를 느끼면서도 밥풀을 흘려가며 꾸역꾸역 볶음밥을 먹고, 남의 집 우유를 몰래 훔쳐먹다 들켜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결혼식 당일 신랑에게 바람을 맞은 은재(김현주)도 못지않다. 엉망이 된 결혼식장을 빠져 나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여행사에 전화해 허니문을 취소하며 “뭐요? 20퍼센트요? 그게 말이 돼요? 반은 돌려 줘야죠”라고 싸우는 일이다.
이 정도면 집을 빼앗기 위해 각목을 휘두르는 조폭 앞에서 “아저씨들 지금 차력 쇼 하는 거냐”며 웃는 무열 엄마(박원숙)와 부업을 망쳐놓은 심술쟁이 남편(신구)을 물뿌리개를 든 채 동네방네 쫓아다니는 끝순 할머니(여운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지 않을까?
오버 캐릭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명랑소녀 성공기’(2002)의 계보를 잇는 드라마는 ‘파란만장 미스김 10억 만들기’ 말고도 많다. 3월 9일 종영한 KBS2 ‘낭랑 18세’에서 스토커에게 날라차기를 보여준 여고생 정숙(한지혜).
▲ 매력을 만천하에 알린 KBS 2 ‘낭랑 18세’의 한지혜, SBS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동네 폭력배들에게 발길질을 하고있는 장나라, MBC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명세빈. (왼쪽부터)
일찍이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피아노줄의 힘을 빌려 허공을 가르며 깡패들을 향해 발을 날렸던 양순이(장나라)를 쏙 빼 닮았다.
‘낭랑 18세’ 후속으로 방영되고 있는 ‘백설공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마영희 역을 맡은 김정화는 머리를 뽀글뽀글 말고, 검고 큰 안경을 쓴 채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케이크에 자기 얼굴을 박고 때로는 성형수술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대장금’을 떠나보낸 MBC도 이에 질세라 4월 21일부터 수목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선보였다. 방송기자지만 하루가 멀다고 ‘물먹고’ 사랑에도 채인 신영(명세빈)은 항문외과를 찾았다 초등학교 동창인 준호를 만난다. 꿋꿋하게 자신의 환부를 동창 손에 내맡기는 명세빈에게서 순수ㆍ가련 이미지로 무장했던 옛날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오버 캐릭터가 드라마에 등장한 건 최근이 아니다. 일찍이 시트콤을 위한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해도 드라마에서는 약방의 감초 역할 정도였던 이들이 이제 당당히 주연으로 등장하고 있다.
문화평론가 한동기씨는 “일차적으로는 자극적인데 익숙해진 시청자의 눈길을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만으로는 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한 세대들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드라마가 변해가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오버 캐릭터는 유쾌하다. 자존심이나 논리보다는 그때그때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려는 이들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만화같은 세계에 빠져 드라마가 엄연한 현실을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대성 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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