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장에 가는 날이다. 주말을 비켜서 가면 덜 북적거린다. 멋모르고 주말에 간 적이 몇 번 있었다. 한국 마켓이 요즈음 타민족들에게도 선전이 잘되어 주말이면 인종전시장 같다. 오래 전 뉴욕 자유의 여신상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지구 위의 모든 인종들이 다 모였구나” 하면서 이 동네서 보지 못했던 인종들까지 보고 깊은 혼돈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만큼은 아니어도 이곳 한국 마켓도 남미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월남인, 흑인, 백인,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중동 등 대충만 보아도 그렇다. 온갖 인종들을 보는 게 재미있기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급적이면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은 날을 고르게 되었다.
대형 마켓에서다. 진열대 사이가 처음부터 너무 좁은 탓도 있지만 원체 붐비는 주말이라 카트 하나 마음대로 옮길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을 집으러 놓고 간 카트가 길을 막고 있어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것도 모르고 그 사이를 막무가내로 지나가려던 사람이 내게 잔소리를 해댔다. 조금이라도 비켜주려 움직이다가 다른 이의 옷을 스쳤나보다. 총알 같은 욕이 날아왔다. 소름끼치도록 차고 가시 돋친 나직한 말투였다. 기가 막혀 돌아다보니 젊은 인도여성이었다. <그렇구나. 시장이 아니고 전쟁터구나. 여기가 진짜 전쟁터인 걸 내가 몰랐었구나> 하는 깨달음은 따끔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을 연거푸 이런 일이 있은 후 나는 그 집에 제 아무리 사고 싶은 게 있어도 가질 않는다. 세일 가격이 기막히게 좋아도 안 간다. 그리고 규모가 그 집만 못하고 가격이 훨씬 비싸도 타인종이 비교적 적고 한국인이 주고객인 곳으로 간다.
나는 장에 가는 날이 좋다. 아마 모든 주부들도 그러하리라. 둘이서 먹고 싶은걸 사고 비디오도 빌리고 나온 김에 입맛 따라 외식도 하고 집으로 오는 길은 기분 좋은 길이다. 그렇게 장을 보고 나온 어느 날, 깜짝 놀랐다. 파킹장에 세워놓은 차 옆구리를 누군지 받아 찌그러트려 놓고 갔다. 기가 막혔다. 복잡한 네거리도 하이웨이도 아닌 파킹장, 그것도 제일 한가한 월요일에. 빈자리도 많은데 어떻게 운전을 했길래? 도대체 누구였을까? 약이 올라도 누구에게 탓할 수조차 없으니 더욱 화가 났다. 구겨진 차는 구겨진 자존심만큼 부끄러운 것이다.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바디샵에 다녀와서 말끔해진 차를 보고 마음도 편해졌다. 그리고 두어 달 후 애난데일에 나갔던 김에 근처 한국 마켓에서 당장 필요하지도 않은 장을 보고 나오니 또 차가 찌그러져 있었다. 지난 번 경험이 있어 일부러 파킹장 끝 한구석에 놓은 차를 말이다. 이 차도 먼저 번 차만큼 우리의 자존심을 긁어 놓았다.
미국 온지 며칠 안 되었을 때다. 차가 아직 없는 우리를 위해 친지가 우릴 세이프웨이에 데려갔다가 뒤차를 살짝 쳤다. 폭설 위에서였다. 그는 종이에 주소, 이름, 전화번호를 써서 그 차에 꽂아놓았었다. 20여 년 세월이 사람의 양심을 이렇게 만들었나? 움직이는 차도 아니고 세워져 있는 차 옆에 자기 차하나 제대로 파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은가? 보나마나 이민 와서 겨우 얻어낸 면허증으로 장보러 왔다가 저지른 일일 것이다.
오래 전 미국회사 건물 10층에서 파킹장을 내려다 본 적이 있었다. 넓은 파킹장에 수많은 차들이 파킹되어 있는데 모두 자로 잰 듯 반듯반듯 세워져 있었는데 그 중 신기하게도 삐딱한 차가 꼭 두 대 있었다. 그 차의 임자는 둘 다 그 회사에 다니는 내가 아는 한국여자들이었다. 내가 그 얘길 꺼냈을 때 그녀들의 변명은 이랬다. “미국인들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차를 타던 사람들이 운전이야 잘 하지” <그래, 그렇다. 너도 나도 이민자들이니 그럴 수 있겠지. 누가 일부러 그랬겠나.>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하나 나의 친지처럼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들의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바디샵에 간 우린 이런 대화를 했다. “누가 쳤는지 아십니까?” “요즈음도 그런 바른 말 하는 사람 있나요?” “왜요, 지금도 그런 사람 가끔 있어요” 나는 얼마 전 고은 시인이 왔을 때 간담회에서 우연히 만났던 내과의사 닥터 한의 충언을 지금 다시 기억해내고 있다. “전 세대 중국 이민자들이 땀 흘리며 만든 고속도로를 우리가 얼마나 잘 쓰고 있습니까. 우리도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 살수 있도록 해놓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할 일이지요. 그리고 아이들이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짧지만 여운 깊은 충언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이럴 때 법도 법이지만 양심의 지시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 살맛 나지 않겠는가. 이것은 자신을 그 자리에 놓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닥터 한의 진심어린 눈동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 차를 치신 분, 부디 이 글로 마음 편해지길 빈다. <시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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