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상<수필가>
세계의 대도시들 중에 서울처럼 지하철이 절실하고 그만큼 시설이 잘 되어있는 도시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승용차만 고집하는 이들이 사라진다면 이 도시의 교통체증은 물론 사시사철 수심에 쌓인 공해도 사라질 터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이대로 가면 서울 시민들은 방독면을 지니고 다녀야 할 터이니 그 품목에 관심을 두라고 비즈니스를 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곤 했다. 셀라-폰 같이 작고 예쁜 방독면을 유행 따라 쓰고 다녀야 할 시대가 올 것 같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 팔아먹었대서 웃었는데 생수를 사 먹게 될 줄 누가 예측이나 했었던가.
이번 선거에서 전철을 타고 국회에 출퇴근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후보가 있었다면 당선은 따 논 당상이었을 텐데, 아무튼 지금이라도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보다 엄청 적은 수의 자가용 족이 욕심만 줄인다면 수입되는 오일이 절약되고 서울은 50년 전처럼 상쾌한 도시가 될 것이다. 초록물결 가로수 사이로 위용 있는 북한산, 남산과 맑은 한강, 세계 어느 나라도 높은 산과 깊은 강, 좌청룡 우백호 명당의 서울 만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웬만한 거리면 지하철에서 나와 마을 버스를 타면 된다. 층계를 걸어나와 맑은 하늘을 바라보면 다리도 튼튼해지고 약속도 제대로 지키고 미소짓지 말라는 법이 만들어 진다해도 지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하철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련한 것들이 남아있었다. 출퇴근 시간이 지난 시간에 청년하나가 층계를 급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여 봐 젊은이! 씩씩한 소리에 돌아보니 지팡이든 할머니였다. 저요? 갈곳이 바빠 보이던 그 청년은 할머니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뛰어 올라가 할머니를 부축하고 천천히 내려온다. 예사로운 일이어서 인지 멈추어 보고 있는 이는 나 밖에 없었다.
차안에는 가끔 노래를 부르는 장님 아내의 허리를 잡고 함께 노래하는 장님 남편이 지나간다. 별안간 공장 문을 닫았다며 공짜보다도 싼 제품을 팔기도 한다. 그 사람이 나가자마자 그런 물건 사지 말라는 차내 방송이 나온다. 할아버지 한 분이 겅중겅중 차안을 왔다갔다 뛰면서 오늘 우리 할망구가 별안간 입원했어요. 동전 한 잎 만 던져 주세요. 가만히 듣다 보니 전 번에 서울 왔을 때 들어 본 것 같다.
손가방을 여는 옆자리에 젊은 여인과 나는 눈이 마주쳤다. 너 지금 속고 있다라는 내 마음을 감지했는지 그녀가 할아버지에게 줄 천 원짜리를 꺼내며 말했다. 저 할아버지는 맨 날 레퍼터리가 똑같아요 알면서도 속아주는 그녀 옆에 앉아있기가 너무 부끄러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은퇴한 H대사와 연락이 되었다. 마음으로 반기는 그분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다가온다. 다음날 아침 전화를 주셨다. 선능에서 경기도 오리행을 타고 오다가 미금에서 내리라고 했다. 책 몇 페이지를 읽고 나니 벌써 목적지다. 7번 출구에서 층계모퉁이에 작게 쓰인 글을 봤다. 휄체어로 오신 분은 버튼을 누르면 와서 도와드린다고 적혀 있었다.
H 대사 부부는 국산 흰색 소나타를 몰고 나왔다. 외제차 한 대 사면 평생 탈 터인데 했더니 이게 어때서 그러면서 미국에서 타던 거 가져왔대요. 부인은 남편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미더워하는 표정이다. 주로 편리한 전철을 이용한단다.
산 속, 창밖엔 논이 그리고 벚꽃이 산자락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식당은 도심의 레스토랑 보다 품위 있게 온통 유리창으로 울창한 숲을 보여 주고있었다. 그 집 한정식은 정갈하고 된장찌개는 혀로 스민다. 엄청 비쌀 것 같은데 시내 여느 식당의 보통 점심 값이란다. H 대사는 나보다 훨씬 연배인데 지금도 마라톤을 완주한다. 몸이 젊어지고 탄탄해지셨다. 반찬을 연신 내 앞으로 옮겨 놓으며 부인은 오래 전에 읽은 나의 수필 한 대목 한 대목을 기억해 주어 길지 않은 타국에서의 연을 두텁게 해주었다.
두 분을 바라보며 선능역에 걸려있던 어느 스님의 글귀가 생각났다. 완전히 기억은 안 되지만 일생이 괴로워도 하루를 산다고 생각하면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천년도 하루가 쌓여 이루어진 것, 하루처럼 천년을 살라는 아마도 그런 글인 듯 싶다.
서울을 떠나기 마지막 날 밤도 좀 늦게 지하철로 이어지는 지하도를 걷다 보니 갈곳 없는 남자들이 모서리마다 웅크린 체 잠을 청하고있었다. 그들이 화내지 만 않는다면 술 취한 나도 곁에 눕고싶었다. 지하철은 늙으신 우리들 어머니 품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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