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주필)
미국의 대표적 철학은 프래그마티즘이라고 하는 실용주의이다. 유럽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는 원래 철학이란 것이 없었다. 유럽의 여러가지 사상과 사조가 그대로 유입되어 미국인의 생각을 지배했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독특한 환경과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한 사회와 인간 사고의 변화를 배경으로 생성된 것이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란 어떤 사상이 아니라 관념이나 사상을 그 자체가 아닌 행위와 관련하여 파악하는 자세 또는 입장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미국의 실용주의는 1870년대에 C.S. 퍼스에 의해 주창되어 19세기 말 W. 제임스에 의해 널리 전파됐다. 그리고 이어 20세기 전반에 G.H. 미드의 사회철학과 J. 듀이의 교육철학으로 발전됐다. 특히 듀이의 실용주의 교육은 현대교육의 초석을 이루고 있다.
듀이는 교육에서 이론이 아닌 행동과 실제 경험을 중시하며 실험실과 작업장을 현실교육에 도입했고 자연과학적인 실험적 내지 탐구적 방법을 교육에 적용했으며 교육과 사회생활의 연결을 중시, 학습은 민주사회생활에 유효하게 참가하는 능력개발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동양에서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걸쳐 3세기간 실학이 크게 융성했다. 실학은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고자 한 유학의 한 학풍으로 조선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싹트기 시작하여 18세기 전후 재야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 왕성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실학은 공허한 논리를 배격하고 실증과 실용을 중시한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일부에서는 토지의 소작조건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는가 하면 농민의 토지 소유를 주장하기도 했다.
실학의 영향으로 화폐경제가 시도되었고 양반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면서 상민의 신분 상승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한국의 최근 선거에서 다수당이 된 여당 안에서 정체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실용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여당 뿐 아니라 청와대에서 이미 이 실용주의를 새로운 정치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는 소식이다. 그동안 진보니 개혁이니 하여 한국사회를 들쑤셔 놓아 국민을 진보 대 보수로 갈라놓았던 정부가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실용주의를 들고 나온 것은 대통령이 탄핵을 당해보기도 하고 맘에 없는 이라크 파병 결의도 해보면서 일년을 좌충우돌 해 본 후 뒤늦게 얻은 지혜일 것이다.
실용주의는 진보나 보수와는 차원이 다른 말이다. 진보와 보수가 다분히 감정적이라면 실용주의는 실증적 과학적이다. 진보와 보수가 이상을 향한 것이라면 실용주의는 현실적인 것이다. 실용주의는 현실의 상황에서 가장 이익에 부합하는 유익을 추구하는 자세를 말하기 때문이다.
장사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장사를 하는 사람은 손님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물건을 팔지 않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는다. 손님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나이 든 사람이든 어린 사람이든 값을 제대로 내고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에게는 모두 판다. 또 빳빳한 새 돈을 내는 사람이나 꾸겨진 헌 돈을 내는 사람에게 모두 물건을 판다. 백인에게만 물건을 파는 보수도 아니고 흑인에게만 물건을 파는 진보도 아니다. 새 돈만 받겠다는 보수도 아니고 헌 돈을 받아야 한다는 진보도 아니다.
그러므로 정치에 실용주의가 제대로 도입된다면 보수와 진보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풍토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실용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수와 진보부터 버려야 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국익과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진보적인 정책을 선택해야 하고, 반대의 경우에는 진보적인 사람들도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해야 한다. 친미와 반미, 친북과 반북, 친중과 반중이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고정된 사고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실용주의이다.
중국의 등소평이 중국의 개방개혁을 단행할 때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고 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주의 방식을 채택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중국은 이같은 실용주의의 덕분으로 경제 초강국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가 무슨 얼어죽을 사상이란 말인가. 한국도 더 늦기 전에 진보와 보수를 걷어치우고 실용주의 노선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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