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선 <본보편집위원>
지난 총선에서 열린 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야당의 노무현대통령 탄핵이었다. 그 탄핵을 가장 앞장서서 주도한 조순형 전 민주당 총재는 여당의 총선 승리에 가장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화려하게 기사회생시키면서, 자신이 이끌던 민주당을 처참하게 몰락시켰고 자신마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겠으나 결과는 그렇게 나타났다.
조총재가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의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지적이 있는 데요
국회 탄핵통과로 민주당의 여론이 급전직하하고 있을 때 한 기자가 조총재에게 이런 질문을 한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30년 정치 헛한 거지 뭐
그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혼자말 처럼 허탈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총선은 기자의 질문과 조총재의 답변대로 되고 말았다. 무엇이 노련하고 경험 많은 30년 정객을 이처럼 초라하게 퇴장하게 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다. 세상과 민심의 변화를 절실하게 파악하지 못한 한가지 이유밖에 없다. 기득권 세력의 일원으로 현재의 상황에 안주한 탓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파악해서 흐름을 탄 사람이 정치인 노무현이다. 정치 경력으로 따지면 그는 조총재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여론을 읽고 그것을 활용하는 포퓰리즘의 정치에서는 조총재를 비교할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유권자들은 노무현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남아있긴 하지만 여론은 이미 그를 복권시켰다.
좋던 싫던 이제는 그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정치이념을 가졌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무조건적인 비판도 배제할 수가 있다.
나는 한국에 진정한 의미의 보수나 진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보수와 진보로 나눈다면, 대체로 보수는 기득권층, 진보는 소외계층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주류, 비주류라는 비유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고 본다.
기득권층은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40대 이상, 소외계층은 그 그렇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젊은 세대는 연령적으로 기득권층에 들기 어려운데다 감성적으로 진보에 가깝다.
소외계층은 소수의 재벌이 다수의 중소기업과 근로자들을 휘두르는 현실을 개탄한다. 소수의 유명대학들이 유능한 인재를 독식하고 그 인재들이 사회의 기득권을 독점하는 현실을 부정한다. 상위 5%가 전체 부의 90%를 과점하고 있는 현실도 심정적으로 인정하지 못한다.
자신들도 기득권층이 되고 싶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진보니 뭐니 거창하게 포장하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그 때문에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미에 동조하는 것도 미국이 결국 기득권 세력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않을 것이다. 좌경화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심리에서 출발한 것일 것이다.
그동안 세상이 이렇게 변했고, 어쩌면 그렇게 변하게 만든 것이 기득권 세력이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그렇게 변화된 민심을 절실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이 빨리 바뀌기를 바라는 그런 계층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잡았다. 그는 유권자들의 그런 욕구를 누구보다 잘 파악했고 그들의 지지를 다시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지난 1년여 그는 좀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세상을 뒤집어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을 뒤섞고자 시도했다. 자연 기득권층의 반발이 거셀 수 밖에 없었다. 기득권층은 비록 소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뒤집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득권층을 자극해 탄핵소추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자신을 몰아가면서 유권자들의 감성에 호소했다. 한편으로는 검찰을 통해 도덕적으로 열세일 수 밖에 없는 기득권층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대안 부재 상황을 만들었고 그것이 성공했다.
어쨌던 유권자들은 과반수가 넘는 국회위원을 열린우리당에 몰아 줌으로써 1년여 계속된 힘겨루기를 종식시켰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소수에서 다수로 탈바꿈한 노정권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국민의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다.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가 보여준 지난 1년여의 힘겨루기를 보면 세상이 60~70년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국제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는 하면서 그러는지.
여든 야든, 보수든 진보든 이제는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다. 여당은 어디 한곳 이쁜 구석이 없는 한나라당을 되살려 놓은 유권자들의 심중을 헤아려야 한다. 다수의 힘을 자신들의 약속대로 좋은 세상 만들기에 쓴다면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그들의 개혁은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들의 세력 확대에 쓴다면 국민에게 또 다른 고통만 안겨줄 것이다.
과연 다수가 된 노무현 정권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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