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낡아빠진 레코드판을 틀어 논 것 같다. 천편일률의 싸구려 신파조 영화 같기도 하다. 매번 판에 박힌 듯한 스토리다. 게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모호하기 짝이 없어서다.
경애하는 수령이 북경방문에 나섰다. 예의 그 특별 열차 편으로 말이다. 모든 건 비밀이다. 철저히 보안에 부쳐졌다. 스틸린 시대에나 있을 법한 비밀 외교다.
중국의 지도자들을 잇달아 면담한다.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한다. 지구상에 몇 안 남은 공산국가끼리의 우정을 강조한다. 성명서 비슷한 게 뒤늦게 발표된다. 그 성명이란 게 그렇다. 온통 외교 수사로만 돼 있어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김정일 위원장의 북경방문과 관련한 간단한 시말서다. 겉의 모양새는 3년 전 방문과 그리 다른 게 없다. 그런데 뭔가 다르다. 뭐가 다른가. 먼저 워싱턴 포스트를 보자.
“김정일 위원장의 북경 체류 이틀 째 날이다. 외국 귀빈 영접 채비로 천안문 광장이 깨끗이 치어진다. 예포 소리가 들리고 두 나라의 국기가 나부낀다…. 하나는 중국 국기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아니다. 캄보디아 국기다. 훈센 수상의 방문을 맞아 치러진 예식이다. 경애하는 수령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
중국 언론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보이는 건 오직 한국 기자들뿐이다. 이들은 아마 ‘가장 위대한 언론인들’인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캐냈으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직접 아주 조심스럽게 흘리는 정보에 따라 움직일 수도 있는 것이고….
한국 신문들은 잇달아 특종을 터뜨리고 있다. 이 상황에서도 중국 외교부는 김정일의 북경도착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왜 비밀외교인가. 지난주 체니 부통령은 북경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의 북경방문과 관련된 소문의 진위를 물었으나 시원한 해답을 듣지 못했다.”
인용이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이 기사는 두 가지 포인트에서 뭔가를 암시하는 듯 해서다. 우선 그 타이밍이다. 체니가 다녀간지 한 주도 못 돼 북경방문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체니는 먼저 일본을 방문했다. 이어 한국에 도착했다. 그날이 총선 날이다. 우리 당 승리로 굳어진 그날 체니는 한국에서 연설을 했다. 자유체제와 독재체제를 대조해가며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 그러면서 북한에 대한 강경 기조를 결코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방문이다. 상하이 발언이 나왔다. 북한 핵 위기를 또 한 차례 공개적으로 강조하면서 발언수위를 높였다. 미 행정부는 외교적 방법 외에도 북한의 핵무장을 저지시키는 방안을 강구할 수도 있다는 강력한 암시다.
관련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입증하는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의 칸 박사가 제시한 증거가 그 하나다.
핵을 포기한 리비아로부터도 확실한 물증을 얻어냈다고 한다 .이란과의 연계설도 제시된다. 이스라엘의 공습에 대비해 핵무기 개발프로그램을 북한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게다가 알 카에다와의 유착설도 파다하다.
미국은 사태를 상당히 심각하게 보고 있다. 그 강경 입장을 분명히 전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외교는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11월 선거까지는. 그렇지 않아도 이라크 사태로 골치가 아프니….
워싱턴의 분위기를 확실히 감 잡았다. 중국의 지도부는 그래서 마치 북한 핵 문제해결을 하청이라도 받은 양 적극 나섰다. 김정일의 북경방문은 이런 배경에서 갑작스레 이뤄진 게 아닐까. 다른 미스터리의 포인트는 한국 언론의 특종이다. 한 미디어가 특종을 한 게 아니다. 거의 동시에 한국의 언론이 김정일의 북경방문을 다루었다. 미국 언론들은 한국 신문들을 인용하기에 바빴고.
한국 언론이라고 특종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아무래도 고의적으로 정보를 흘렸을 가능성이 크다. 왜 정보를 흘렸나. 뭔가 고도의 언론 플레이가 있는 것 같다. 정보를 흘린 측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에서.
4.15 총선 후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정치적 상황은 결코 김정일 체제에 나쁘지 않다. 새로 정치의 주 세력으로 떠오른 386세대는 북산체제에 비교적 호의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도 고려 사항이다.
한국의 총선이 끝난 게 그리고 보니 겨우 한 주다. 그런데 상당히 지난 것 같다. 흐름이 뭔가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아서다.
또 다른 뉴스가 전해진다. 주한미군 감축에 대비해 아시아지역 작전을 지휘하는 미 육군 사령부를 일본으로 옮긴다는 거다. 한반도를 둘러싼 흐름은 분명히 가속을 타고 있다.
옥 세 철<논설실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