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형석이 JK 건축 김 사장과 점심식사를 마치자 훌쩍 2시가 넘었다. 그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미스 정이 건네준 전화메모부터 훑어보았다. 거의가 가까운 지인들 혹은 재료상 등에서 걸려온 전화였고 정작 간판문의는 고작 한 통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종종 경기가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요즘 같지는 않았다. 이번 불황은 형석이 12년 전 이곳에 간판제작소를 차린 이래로 최악이었다.
동희엄마, 음식점 간판, 전화요망 간단한 메모와 함께 그쪽 전화번호가 적혀있었지만 형석은 선뜻 전화 할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문의해온 사람이 여자일 경우 대개는 상담하느라 입품만 들 뿐, 실제로 비즈니스 성사율은 형편없이 낮기 때문이다.
‘이봐, 지금 그런 배부른 생각할 때야? 엊그제 공장의 미스터 정 내보낸 것 생각 안나?’ 때마침 붉어진 눈시울로 마지막 인사를 하던 미스터 정이 떠올라 그는 냉큼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여기 아트사인입니다. 동희엄마 좀 부탁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한참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전화 바꿨습니다. 누구시죠?
형석의 예상과는 달리 동희엄마라는 여자의 목소리는 너무 여렸다. 설마 이런 여자가 직접 음식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대개 자신이 직접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나서는 여자들은 우선 목소리부터가 씩씩했다.
그녀가 상담을 오겠다는 시간은 오후 7, 형석 역시 그때까지 공장에 들려 김 사장이 맡긴 일감을 거들고 돌아오면 딱 맞는 시간이었다. 말이 사장이지 사무실 지키는 미스 정과 공장 기술자 몇 명만 데리고 디자인, 견적, 경리까지 혼자 하려니 경석은 늘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사실 산업미술을 전공해 자동차회사의 디자인실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형석의 사회적 간판은 썩 괜찮았다. 그런데 미국에 이민 와 남의 비즈니스 간판을 화려하게 만들어주자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간판은 되레 초라해졌다.
안녕하세요? 7시가 조금 지나 나타난 여자의 얼굴이 형석의 눈에 많이 익었다. 전화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전혀 친숙한 느낌이 없었는데...
어머... 저 혹시 이형석씨 아니에요?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야 비로소 형석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은하씨?
비록 얼굴에 기미가 끼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잡혔지만 그녀는 틀림없는 전은하였다. 국문과생이었던 그녀는 학교 때도 지금처럼 몸매가 가냘펐다. 게다가 워낙 조용하다보니 그녀랑 길게 이야기를 나눠봤다는 남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하는 남학생들의 가슴 저 밑바닥에 숨겨진 오라비 본능을 자극하며 저들을 설레게 했다.
태식이 형은 어떻게 지내세요? 놀라움과 반가움이 어느 정도 가시자 형석은 당장 태식 선배가 궁금했다. 태식은 형석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선배이기도 했다.
한국에 있어요. 3년 전 저하고 아이만 건너왔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치로 보아 선배의 얘기는 더 이상 묻지 않는 게 좋을 듯 싶었다. 솔직히 사회에 그럭저럭 적응하고 살기에는 그는 반골 기질이 너무 강했다. 굳이 은하씨 입으로 얘기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거친 손이 그들 부부가 살아온 삶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다. 형석은 괜찮다는 그녀를 억지로 끌어 근처의 식당으로 데려갔다.
그 사람은 언제나 똑같았어요. 늘 사회의 부조리만 바라보니 화가 쌓였죠. 투사인 자신을 소외시키는 사회가 원망스러워 매일 술을 마셨고요. 세월이 변해도 반골은 평생 반골일 뿐이죠.
식사와 곁들여 시킨 포도주 탓인지 그녀는 의외로 자신의 얘기를 조분조분 털어놓았다. 3년 째 식당 일을 하며 오빠집에 얹혀 사는 거랑 최근 오빠의 도움으로 조그마한 분식점을 내려는 것까지.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선배를 꼭 닮은 아들의 사진도 보여주었다.
은하씨와 식당주인이라... 거 되게 안 어울리네. 그나저나 식당이름은 정하셨어요?
네, 정했어요. 형석씨가 한번 알아 맞춰 보세요. 그녀가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음... 행주치마? 맞지요? 행주치마...
그녀의 이미지와는 영 동떨어졌지만 학창시절 그녀의 별명은 분명 행주치마였다. 두 사람은 모처럼 활짝 개인 웃음을 터뜨렸다.
80년대 초, 평화적으로 시작된 학내시위는 오후가 되자 화염병과 최루탄이 뒤섞이며 과격해졌다. 골수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일단 데모가 시작되고 전경들이 들이닥치면 학생들은 쉽게 한편이 됐다. 형석 또한 동급생들과 함께 도서관 앞의 보도 블록을 깨서 학교정문 쪽으로 나르던 중이었다.
헤이, 전은하, 그 치마로 돌멩이 좀 날라줄래? 얌전히 스커트를 차려입은 그녀가 형석 일행을 비켜가자 누군가 그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시위에 동조하지 않는 그녀를 향한 일종의 비아냥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말 그대로 홍당무가 되었다.
야! 제가 지금 행주치마라도 둘렀냐? 네가 권율장군이라도 된단 말야? 평소에도 카리스마가 넘치던 태식 선배의 호령에 형석일행은 찔끔했다. 그 틈에 태식은 정문은 위험하니까 뒷문 쪽으로 돌아가요. 그녀의 퇴로까지 챙겨주었다. 그날 일로 그녀는 행주치마라는 별명을 얻었고 선배는 훗날 그녀의 남편이 되는 행운을 얻었다. 인연이란 게 그렇듯 엉뚱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음 주에 다시 만나 간판디자인을 확정짓기로 했다. 마침내 낡은 차를 몰고 그녀가 떠나가고도 형석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형석이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엔 어느새 별들이 총총했다. 마침 별똥별 하나가 오른쪽 하늘로 길게 사선을 그으며 떨어졌다. 형석은 그 별을 냉큼 주어다가 그녀의 행주치마에 덥석 담아주고 싶었다. 마치 오라비라도 된 것 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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