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휘 (소설가)
병호는 커피 생각이 났다. 어제 저녁 마누라와 전쟁을 치렀다. 아침까지 협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냥 나왔다. ‘협정이 안되고 계속 이렇게되면 그냥 가는 것이지 뭐.’ 병호는 24시간 편의점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커피, 음료수를 들고 줄을 서 있었다. 병호도 커피 한 컵을 들고 줄 선 사람들 뒤에 섰다. 앞사람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풍겨왔다. 값싼 향수도 아니고 멕시코사람들 특유의 냄새도 아니었다. 병호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병호는 막 뽑은 커피 향에 도취되어 살며시 눈을 감으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미국 생활이 힘들어도 아침에 향긋한 커피 마시는 기분에 살아간다는 말이 생각났다. 병호는 커피 향 같은 마누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눈을 떴다. 그 순간 병호 앞으로 한 백인 여자가 들어섰다. 그녀의 손엔 스타킹 통하나와 생수병을 들고 있었다. 줄서있는 나 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뻔뻔스럽게 새치기를 하였다. 커피 맛이 싹 달아나고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가 얄미웠다.
망할 년! 병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그때 카운터에서 일하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생글생글 웃고있던 얼굴이 갑자기 우거지상으로 변하였다. 병호는 무안해서 고개를 돌렸다. 병호는 분명 한국말을 하였다. 병호는 카운터에서 일하는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전에 한번 들어 왔을 때는 이태리 사람이 있었다. 병호의 말을 알아들었으니까 한국 사람인 모양이다. 백인 여자는 돈을 지불하고 나갔다. 병호는 컵을 내려놓았다.
정 과장님, 아침부터 무척 언짢으셨나봐요?
과장. 오랜 동안 잊고 있었던 호칭에 깜짝 놀랐다. 병호는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엷은 미소를 짓고있는 얼굴이 전혀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구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 과장님, 저 기억 안 나세요?
글쎄요.
지금 바쁜 시간이니까 전화 번호를 주세요.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병호는 직장 전화번호를 적어두고 나왔다. 병호는 차에 와서도 과장이라고 부르던 여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병호가 과장으로 근무한 자재과엔 여자가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럼 다른 부서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병호는 차를 몰고 바디샵으로 왔다. 병호는 어제 늦게 정면충돌하여 들어온 BMW차가 있는 곳으로 간다.
정씨. 이차 한번 잘 수리해봐.
아직 새차니까 잘 해보죠.
이차 운전하던 여자는 지금 혼수상태에 있다고 해.
사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응, 고등학교 동창 마누라야.
여자가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한 것 같은데요.
글세. 요즘 부부사이가 안 좋다고 하더니 결국 사고를 낸 것 같아.
남자들도 자숙해야겠지만 여자들이 더 문제입니다. 남편은 간판이고 그 아래서 마음 되로 놀고있으니 정말.
어떻게 자네 마누라는 요즘 조용하나?
사장님, ‘약한 자여 그대이름은 여자이니라, 그러나 그 어머니는 강하였다.’ 어느 철인이 한 말 알죠?
그래 들어본 것 같다. 그런데 왜?
여자는 말이 많고, 남자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멋을 부리고, 유행을 잘 따르고, 남자들을 유혹하려고 하는 것이 여자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여자는 제 고을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여자가 밖으로 나돌아다니면 안 좋다는 뜻입니다.
그래 여자와 사기그릇은 나 돌리면 안 된다고 했지.
어머니. 자식을 가진 여성입니다. 여자이기전 어머니로써 그 역할을 다 할 때 가정에 행복이 있고, 사회질서가 잡혀가는 것이 아닐까요. 어머니로써 직장과 가정에서 훌륭하게 자기의 의무를 잘하는 반면, 허영에 들뜬 여자들도 있으니 큰 문제죠. 요즘 한국이나 미국이나 여자를 너무 보호해주고 있으니 까불고들 있는 것 같아요.
이 사람아, ‘결혼은 미친 짓이다.’ 하는 영화도 못 봤어?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사장은 사무실로 뛰어간다. 병호는 차 주위를 천천히 돌아본다.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할지 생각을 한다. 병호는 한 발을 찌그러져 있는 차에 올려놓고 커피를 마신다.
그때 병호의 망막 속으로 한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박 희영.
희영은 회사 홍보실에 근무하였다. 병호가 과장으로 진급된 후 홍보 책에 낼 글 한편을 부탁해왔다. 그때 수필 한편을 써 주었다. 그 수필이 사내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그러자 또 원고를 부탁했고 다른 사람들의 원고 교정도 부탁해왔다. 그런 관계로 병호는 가끔 퇴근 후 포장 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회사에 대한 불만도 토해냈고, 젊은 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병호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면 희영는 한발 더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한해가 저물어갈 무렵 포장마차에서 희영은 말도 없이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말이 없었다.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 희영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정과장님, 아니 정 병호씨 왜 빨리 결혼 해죠? 꺽.
희영는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왜 빨리 결혼했느냐고 물었죠?
희영은 오른 손을 들어 권총 쏘는 시늉으로 병호를 겨냥했다. 병호는 희영의 손을 잡아 내렸다. 순간 병호의 가슴으로 왈칵 안겨 들었다.
다 주고 싶었는데. 바보같이 벼 엉신처럼...
그렇게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던 희영이. 그렇게 주정을 한 후 희영은 직장을 떠나버렸다.
병호는 옛일을 생각하면서 찌그러진 차의 바디를 한 나씩 뜯어내고 있었다.
정씨, 전화 받아봐. 예쁜 여자의 음성인데.
전화할 여자가 없는데.
빨리 받아봐.
네. 전화 바꿔 얻습니다.
정 과장님. 아직 저를 기억 못하세요?
박 희영씨. 즉시 못 알아봐 미안했어요. 그런데 언제 미국에 왔죠?
십 이년 되었어요. 과장님은 얼마나 되셨죠?
난, 삼 년 되었어요.
과장님, 이번 주말에 시간 낼 수 있으세요?
오후면 시간이 있어요.
그럼 하프 문 베이 바닷가에 있는 ‘커시스 커피숍’에서 만나요.
병호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온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여자가 홧김에 서방질한다고 했는데. 나도 한번 바람을 피워봐.’
병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찌그러져 있는 차 쪽으로 걸어간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