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겨울철에만 그것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두 번 가보았던 세도나 여행에 대해 한번쯤은 샅샅이 그곳을 둘러보고 싶다는 미련을 갖고 있기는 했었다. 더구나 오래 전 ‘기수련’에 심취했던 나에게 지구상에서 ‘기’가 가장 많이 발산된다는 그곳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4박5일거리의 짐을 싸들고 길을 떠나며 타고 간 자동차는 우리 집에서 가장 낡은 것이었다. 한때는 나의 좋은 동반자였지만 지금은 늘 스트릿 파킹이 된 채 구박받고 있는 듯한 그 민트빛 자동차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을까.
먼 길을 떠나야 했는데도 정비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은 잘못이었다. 세도나로 들어가기 전 하룻밤을 묵기로 했던 콜로라도 강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저녁을 먹으려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신호등에 정차했던 자동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급히 식당과 주유시설이 함께 있는 곳에 주차를 하고 보니 자동차 앞부분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하늘은 햇빛이 사위고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막막해 왔다. 남편은 후드를 열고 이리저리 살피더니 트랜스미션 오일이 새고 있는 것을 발견해 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중년의 미국 여인이 다가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녀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당황해 하는 내 모습을 다 보고 있었노라며 미소를 띠었다. 이런 사람을 익명의 천사라 해야 하나. 그녀의 남편은 적당한 장비도 없는 우리를 위해 임시조치를 취해 주며 잠시는 괜찮겠지만 내일 아침 꼭 수리를 하고 먼 길을 떠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석양에 떠나는 그들을 보며 아직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따뜻해 왔다. 그들에게 갚아주지 못하는 이 고마움을 나도 언젠가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갚아 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모처럼의 여행은 첫날부터 그렇게 자동차 소동으로 시작되고 둘째 날 아침 일찍 세도나로 출발하기로 했던 계획을 미루고 우선 자동차부터 수리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정비소를 들러보았지만 밀린 일이 많아 그 날 안으로는 고칠 수가 없다 하는데 한 곳의 정비사가 자신이 5시에 퇴근한 다음 집으로 따라오면 1시간 정도 걸려 고쳐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5시가 가까워 정비소 앞에 도착했을 때 웬일인지 주변이 고요하기만 했다. 무심히 길을 지나는 사람에게 시간을 물었더니 지금은 6시이며 저기 콜로라도 강을 경계로 한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뿔싸! 우리가 잠을 잔 강 너머 호텔까지는 캘리포니아와 시간이 같았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시간이 바뀔 줄이야. 다시 두 번째 날의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이제는 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세도나에 예약해 놓은 기백불짜리 비싼 숙소는 해약이 안 된다니 불안한 자동차를 끌고 그 먼 길을 달려갈 밖에는.
하늘엔 석양이 아름답게 번져가고 임시조치를 한 자동차는 그런 대로 인내심 있게 잘 달려주었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도착한 영혼의 도시 세도나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도시 전체가 밤의 은은한 불빛 속에 세상의 모든 뜻 깊은 것을 다 안다는 듯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첩첩산중 산골 동네엔 인적 하나 없고 어름어름 주소를 찾아 겨우 우리 숙소에 도착하였다. 여느 호텔과는 달리 겨우 11개의 방만으로 운영하는 팬션 하우스인 그곳엔 이미 스태프들이 퇴근한 한 뒤였다.
낮에 전화로 약속한 대로 메일박스를 뒤져 우리 열쇠를 찾아낸 후 현관문을 따고 이층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로즈 알보’라는 우리의 장미 방으로 들어섰다. 모처럼의 여행이라며 숙소에 좀 과하게 투자하는 남편에게 불만을 표했던 나였으나 막상 들어서고 보니 온통 장미 일색으로 꾸며놓은 그 방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나는 욕실까지 둘러본 후 슬그머니 발코니 문을 열어 보았다. 전경엔 세도나의 신비로운 산이 어둠 속에 우뚝 서 있고 발 아래로 졸졸 흘러가는 계곡물 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수면에 하얀 백조 두 마리가 물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 숙소는 바로 그 아름다운 계곡에 면해 지어져 있던 것이다. 잠시 흘러가는 물소리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 남편이 약간 흥분한 몸짓으로 발코니로 나왔다. 잠깐 둘이 선 채 계곡물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서려던 찰나 발코니 문이 잠긴 채 꼼짝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기가 막혔다. 닫으면 자동으로 잠기는 문이란 것은 이 숙소 주의사항 어디에도 없었고 우리는 열쇠도 방에 남겨둔 상태였다. 일이 이쯤 되면 서로를 탓하기 쉬운 감정이 되고 만다.
나는 남편에게 왜 쪼르르 따라 나왔느냐고 했고 그는 왜 그렇게 방정맞게 발코니로 먼저 나갔느냐고 했다. 문을 누가 닫았냐는 둥 한참 시끄럽게 실랑이를 해 본들 이미 굳게 잠겨버린 문이 열리겠는가. 우린 그만 지쳐 입씨름을 그만두고 주머니에 갖고 있던 자동차 열쇠고리를 곧게 펴서 맥가이버처럼 열쇠구멍에 꽂고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다음 시도는 길에 대고 소리를 치는 일이었다.
아무리 ‘핼프 미’를 외쳐보아도 길엔 인적하나 없고 밤은 깊어만 갔다.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우리의 장미 방은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그야말로 그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춥지 않은 날씨였는데도 점점 한기가 느껴졌다. 유리창이라도 깨보겠다고 남편은 의자를 들어 쳐보았지만 단단한 통 유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두운 계곡을 내려다보며 아 주여! 너무 분에 넘쳤나 보옵니다. 우리를 용서하소서. 하고 희극적인 기도를 했다. 한 시간 반 정도 그런 지경에 이르러 있을 때 어디선가 경찰 차가 달려오더니 바로 길옆에 섰다. 고맙게도 누군가 신고를 한 것이다.
비상연락망을 통해 당장 달려온 오너가 문을 열어주어 다시 방으로 들어 왔을 때는 이미 새벽 1시가 넘어 있었다. 고난 없이는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려운 것인가. 한밤의 고난을 치른 후에 바라본 그 도시의 아침은 기대보다 더 아름다웠고 나는 그 감흥을 참지 못해 온 방의 창문에 드리워진 블라인드를 다 걷어 올렸다. 그 순간 아직 잠을 자고 있던 남편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은 아직 잠옷차림이라며 벌컥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산산이 부서지던 그 아침의 감흥… 아 주여! 나는 좀 아름다운 것에 반응하면 안 됩니까. 내가 너무 지나쳤습니까. 나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솟았다. 아 그래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대가가 있다. 고난의 대가, 슬픔의 대가…
더 아름다운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 지금 차라리 지독히 슬퍼지자. 나는 욕실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그 날 하루 종일 더 아름다운 것을 만나기 위해 슬픔을, 고독을 그렇게 좀 쌓아두려던 그 아침의 심산이었다.
며칠동안 혼 깊이 스며들던 그 도시의 아름다움을 가슴속에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 파란만장(?)했던 여행에서 돌아와 이제는 다시 커피 잔을 들고 우두커니 앉은 나의 시간이다. 그새 4월이 환하게 피어나고 창가엔 꽃이 만발하다. 문득 한 때의 봄꽃으로 피어나기 위해 저 꽃이 치렀던 지난 계절의 고난을 생각하게 된다.
뿌리에서부터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과 바람에 아프게 꽃봉오리를 열던 일들… 결국 구경꾼처럼 언제까지나 아름다움의 관찰자가 되기보다는 내 스스로 아름다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꽃껍질 아프게 갈라내며 붉게 피어난 저 꽃처럼. 세월의 온갖 풍상 속에 붉게 형성된 세도나의 그 신비로운 산처럼. 스스로 무엇이 되기 위해 조금은 아픈 고독을, 슬픔을 쌓아 가는 이 4월!
박경숙
▲미주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입상
▲소설가 현길언 교수로부터 <믿음의 문학>에 “방 한칸”추천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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