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서울의 지하철 층계를 숨가쁘게 오르며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 만 보였다. 변하지 않은 것은 하늘뿐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거의 바깥에 이르는 층계 왼쪽 구석에 남루한 장님 할아버지가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다. 모두들 무심히 그 앞을 스치는데 5,6세 되어 보이는 남매인 듯한 아이들이 할아버지 손을 다소곳이 잡더니 움켜쥐었던 돈을 그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출구 쪽으로 내달음질 쳤다. 입구에는 젊은 여인이 아이들이 달려오자 손을 잡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은 혼자 보기 아까운 대목을 이-메일로 보내주는 K형이 띄운 서울 구로 초등학교 3학년 용욱이 글을 요약한다. 55가구가 함께 사는 벌집 중 방 한 칸. 외할머니 표현대로 나면 박스 만한 방에 할머니랑 여동생 용숙이랑 자고 엄마는 구로2동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신다. 아빠는 청송교도소에 계신데 엄마는 죽었다고 말한다. 엄마는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에 취해 울면서 애물단지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 버리자 하실 때가 많다. 친구들이 엄마가 술집작부라고 놀리는 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지난 부활절 날 엄마 미워했던 것 용서해주세요 하고 기도하며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그 날 교회에서 준 찐 겨란 두 개를 할머니 어머니에게 드리며 생전처음 전도를 했다. 몸이 아파 누워 계신 엄마는 흥 구원만 받아 사냐.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3만원 더 올려 달라는데 예수님이 50만원 만 주시면 예수를 믿지 말라도 믿겠다. 엄마가 믿는다는 말에 열심히 기도했다.
어린이 날 글짓기대회가 덕수궁에서 있었는데 서초동에서 아버지와 꽃가게 하던 시절과 지금 상황과 엄마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주면 좋겠다고 써서 1등 상을 탔다.
그 날 저녁에 글짓기 심사원원장이며 동화작가인 노 할아버지 선생님이 물어 물어 찾아오셨다. 할머니는 급히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시고,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내라는 말씀에 엄마는 눈물만 줄줄 흘리면서 엄마가 일하시는 술집에 내려가시면 약주라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자신이 지으신 동화책 다섯 권이나 놓고 그냥 가셨다.
밤늦도록 동화책을 읽는데 책갈피에서 흰 봉투가 하나 떨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수표였다.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분이 계시다니, 예수님이 구원 만 주신 게 아니라 50만 원도 주셨구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씀하셨다.
엄마는 주일날 처음으로 교회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이 솔방울 만해 지셨다. 또 같이 죽자면 어쩌나 하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빨리 편지 써. 엄마가 죽지 않고 열심히 벌어서 주신 돈 꼭 갚아 드린다고 말이야. 엄마의 변화를 예수님께 감사하고 커서 수표를 꼭 갚겠으니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 건강하게 사시도록 돌봐주시라고 기도했다.
지난 3월,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간 60%를 떼어준 29세 신세대 며느리 이효진, 삼성병원 중환자 실에서 수술을 끝내고 시어머니와 볼을 대고 찍은 인터넷에 뜬 칼라사진은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함께 살아온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시동생은 간염 보균자로 판명되어 간 기증이 불가능했다. 그녀는 몰래 병원에 찾아가 조직 검사를 받아 적합 판정을 받았다. 자필로 병원에 제출한 기증 사유서는 그분을 사랑합니다.였다.
이번 부활절을 맞아 우리교회에서는 3일간 피정(避靜)을 했다.
욕심을 가득 싣고 재물의 강을 지나는 우리들에게 자각심을 일깨우는 강론을 들었다. 성가대가 성가를 시작하면 미국인 한사람이 바이올린으로 반주해주었다. 휴식 시간에 다가가 고맙다고 인사했더니 자기는 감리교 신자인데 한국 분인 장모님을 모셔다 드리며 오히려 자기가 더 은혜를 받는다지 않는가, 매주 목요미사에도 장모님 따라와 연주한단다. 신앙이란 우리 모두 서로에게 주는 감동처럼 생각되었다.
성당에서 궂은 일은 도맡아하는 조금은 대접을 못 받는 중년 남자가 우리 그룹이었다. 그와 마주 대화하긴 처음이다. 그는 발표할 차례가 되자 나의 영어처럼 우리말의 주어 동사 목적어가 뒤죽박죽이었다. 귀 기울여 보니 주님을 만난 체험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은 붉어지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기쁜 표정이었다. 순간 내 가슴에도 무언가 떨림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정말 그가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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