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누구누구의 귀가 부처님 귀 같다는 말을 듣는다. 큼지막하니 시원하게 생긴 귀를 말하는 것일 게다.
이목구비라는 말에도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귀건만, 사람을 처음 만나고 난 뒤 그 사람의 귀를 기억하는 일은 흔치 않다. 얼굴의 양편에 별다른 움직임 없이 열려 있는 귀보다는, 깜빡이는 눈이나 바쁘게 소리를 만들어 전달하는 입이나 그들이 중앙의 코와 함께 만들어 내는 분위기가 기억에 남는다. 예컨대 사람을 한 번 보고 난 뒤, 그 사람의 귀가 예뻤다거나, 귀가 아주 잘 생긴 사람을 보았다고 말하는 일은 흔치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관상법에는 귀가 빼놓을 수 없는 관찰대상으로 꼽히고, 귀 때문에 복이 많겠다느니 적겠다느니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 것을 보면, 오래 전부터 귀의 생김새가 사람의 인상에 대해 차지한 중요성을 짐작케 한다.
언뜻 보기에는 별 차이 없이 보일지 몰라도 귀만큼 개개인마다 독특한 기관도 없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국의 영주권을 비롯한 중요한 신분증 사진에는 정면보다는 귀가 보이도록 살짝 각도가 틀어진 측면사진이 사용된다.
모택동의 생사여부가 국제정치의 관심거리였을 때, 미국의 중앙정보부가 그가 이미 죽고 대역이 내세워진 것이 아닌가, 모형까지 만들어가며 진위를 확인하려 했던 것도 귀였다고 한다. 또, 말년의 고gm가 자화상을 완성하기 위하여 잘라냈던 것도 귀였다. ‘자신’을 확인하고 완성하려는 그의 몸부림 앞에 귀는 절대로 얼버무릴 수 없는 그 자신의 정체와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마다 귀의 무엇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일화들이다.
언뜻 보기에 귀는 그저 적당히 접혀지고 펴진 연골과 피부로 만들어진 귓바퀴일 뿐이다. 그 속으로 소리가 들어가도 눈처럼 깜빡거리는 일이 없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닫혀지는 일도 없다. 냄새를 맡는 코처럼 벌름거리거나 쫑긋거리는 일도 없고, 재채기를 하는 일도 없다. 소리가 들어가도 귀로부터는 소리가 나지 않고, 소리가 들어가지 않아도 귀는 변함이 없다. 누구의 귀가 되었건 귀는 언제나 소리 없이 열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 앉아서도 사람마다 듣는 소리가 다르고 깨닫는 소리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에어컨의 모터소리를 들을 때 다른 이는 그 사이로 끼어 드는 벌레울음을 듣는다. 어떤 사람은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거센 물소리를 들을 때, 또 다른 이는 그 물에 저항하며 둥글어지는 바위의 절규를 듣는다. 어떤 사람은 권력의 소리를 들을 때 어떤 사람은 민심이나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 어떤 사람은 높은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낮은 소리를 들으며, 어떤 사람은 큰 소리를 어떤 사람은 작은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침묵을 듣기도 한다. 겉으로 보이는 귀뿐만 아니라, 속귀도 다르다는 얘기다. 속귀가 큰 사람은 귀 밝아 많이 듣고 깊이 들으며, 속귀가 막히지 않고 중심으로 이어진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듣기를 멈추지 않는다.
잠을 깨는 순간의 자명종 소리로 시작해서 TV,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 라디오… 우리들의 세상은 온갖 음색과 크기와 음정과 박자의 소리로 가득 차 있기에 ‘듣기’가 쉽지 않다. 저마다 들리려고 더 크고 더 높은 소리로 외쳐대지만, 그럴 수록 ‘듣기’는 어려워진다. 정치인들도 장사꾼들도, 종교나 학문이나 예술을 내세우는 조금 다른 부류의 장사꾼이나 사기꾼들도 제각기 옳다고, 제일이라고 외쳐대지만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울려오는 참된 소리는 드물다. 껍데기뿐인 소리, 소음에 시달리다보니, 쉬이 속귀가 열리지 않는다. 속귀를 여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속귀 열린 사람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귀는 언제나 열린 형상을 갖추고 있건만 모두가 듣지는 않고 외쳐댈 뿐이다. 저마다 잘났다는데 참된 소리도 참된 귀도 찾을 수가 없다. 답답한 마음에 저절로 비명이 솟아오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러나 내가 지르는 비명 역시 들을 수 없게 엉켜버린 소음의 소용돌이에 또 하나의 소음을 더할 뿐이다.
‘자알 생겼다’는 부처님 귀는 큼지막한 두 개의 귓바퀴로 표현되어 있다. 세상을 향해 커다랗게 열린 바퀴. 인륜의 엉킨 소리를 법륜으로 곱게 자아서 마침내 지그시 눈감은 평온의 미소로 펼쳐내는 것. 부처님의 커다란 귀를 보면 그의 수련은 듣는 일, 그 한 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귀는 나를 보라 소리치지 않고, 언제나 다소곳이 얼굴의 좌우에 붙어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고 있다. ‘나’라는 소우주의 안과 밖에서 만들어지는 참된 소리를 듣는 일. 단지 사람들이 낱말을 꿰어 만든 말이 아니라, 그 말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람’을 듣는 일. 그들의 아픔과 기쁨과 슬픔과, 그들의 생명을 듣는 일. 그들의, 그리고 내 안의 침묵을 듣는 일. 빛의 소리를 듣는 일. 시간의 소리를 듣는 일. 그것이 귀의 본분일 것이다.
과거 깨달음에 도달했던 부처님들의 생김생김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부처님의 커다란 귀는 멋진 상징이었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세상과 영원을 듣는 부처님의 속귀, 또는 그것을 깨닫고 표현한 재치 있는 예술가의 속귀,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김혜령
약력
▲1993년 미주한국일보에 단편소설 ‘깃털’ 당선
▲1994년 <현대문학>에 중편소설 ‘두 개의 현을 위한 협주곡’ 당선
▲2003년 소설집 <환기통 속의 비둘기>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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