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수<편집국 부국장>
서울 시내 한복판(용산)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은 뉴욕의 센트럴 팍에 (미군이 아닌)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과 같다.
과거 한국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던 ‘일부 불순한 운동권’의 주장일까. 아니다. 어제의 운동권에서 오늘의 신주류로 자리잡은 이른바 ‘386 자주파’가 민족감정에 호소한 비유일까. 역시 아니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알뜰하게 헤아린 이 발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다. 지난해 11월 중순 한국을 방문했을 때다.
그러나 이 발언은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불법 정치자금 수사를 둘러싸고 ‘소설보다 재미있는 현실’이 펼쳐진데다 이라크 추가파병을 재촉하기 위한 럼스펠드 장관의 방한에 즈음해 추가파병론과 반대론이 들끓어 이 말에 귀기울인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은 이제 좀 더 자주적으로 변하기 위한 목표를 정해야 할 시점이 됐다.
올해 1월 중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의 전격 경질을 계기로 한동안 한국언론을 장식했던 용어를 빌리자면 (동맹파의 눈으로 보아) 자주파의 철없는 소리같은 이 주장도 럼스펠드 장관의 입에서 나왔다. 미국판 국방일보 ‘성조지’와의 1월19일자 인터뷰에서다. 이 역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한창 타오른 자주파-동맹파 논쟁, 북한에 대해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즉각 중단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손을 보겠다’는 듯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국정연설,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핵전쟁이 일어나 결국 인류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모하메드 엘바라데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의 무시무시한 경고 등 보다 큰 뉴스들에 묻혀버렸다.
그러나 럼스펠드 발언의 의미는 매우 크다. 주한미군의 역할과 기능을 한반도 전쟁 억지력 차원을 넘어 가상적 1호 중국에 대한 견제로 전환한다는 그랜드 플랜의 재확인이다. 물론 그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미국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 중국을 가상적 1호로 보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미군의 재배치와 작전개념 변화를 서둘러왔다.
호주와 인도를 배후지세력으로 보고 이들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까지 불사하며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아귀’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싱가포르와 필리핀에 기지를 건설하는 등 일련의 작업들이 대 중국용이라는 데 군사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미군을 배치한 것도 겉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의 중앙아 침투로 봉쇄를 내걸고 있지만 속으로는 중국을 쥐어짜는 포석이라는 설명이다. 미국은 또 9·11 테러 직후 아프가니스탄을 수중에 넣음으로써 중국을 말발굽 형태로 포위하게 됐다.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경쟁구도가 한국에 미칠 파장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한국인들, 특히 미국땅에 발딛고 사는 한인들을 신경쓰이게 하는 문제다. 주한미군이 경기도 평택-오산 지역으로 이전한다고 해서 당장 북한의 도발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사실, 울트라 초음속 미사일과 전투기들이 주무기로 등장한 현대전에서 문산 동두천 서울에 있던 미군이 평택이나 오산 아니라 제주도나 오키나와에 있다 해도 별 상관이 없다.
결국 남게 되는 골치아픈 문제는 한국과 한국인들이 멀지않아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을 강요받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이다.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팡질팡했던 19세기말의 한반도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19세말 열강들이 그랬듯이 이런 사태는 한국의 뜻과는 관계없이 힘센 그들의 의중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한인들의 눈과 귀가 온통 탄핵이네 뭐네 하는 것에 쏠린 사이 미국이 최근 MD(미사일 방어) 체제구축 1단계로 오는 9월 동해상에 이지스함을 배치하겠다고 공식발표한 것은 하나의 예다. 북핵 6자회담 등 동북아 평화를 위한 살얼음판 대화가 단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나온 이번 발표에 대해 러시아는 MD대응체제 구축에 돌입할 것이라고 즉각 맞불을 놓았다. 핵개발의 명분을 미국의 위협에서 찾고있는 북한이나 미국의 극동지역 군사적 움직임에 대해 가뜩이나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아온 중국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렵사리 성사된 6자회담은 깽판이 될지 모른다는 성급한 전망도 스며나오고 있다.
차떼기 등 불법 정치자금 수사,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찬반논쟁 등 너나없이 흥미진진한 화제들에 신경을 빼앗긴 사이 한반도 주변 상황은 그렇게 휙휙 돌아가고 있다. 한국과 한국인, 나아가 재미한인들에게도 골치아픈 선택을 강요하게 될지 모르는 움직임들이다. 우선 입에 올리기 따끈따끈한 한국발 뉴스도 좋지만 어쩌다 한번쯤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국제뉴스를 향해서도 안테나를 세워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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