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고름이 살 되지 않는다.’는 말은 확실히 옳았다. 특별히 김영웅씨와 장필연씨의 관계가 그랬다.
20대 초반 이후 50이 넘은 지금까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껄끄러운 감정을 삭혀보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럭저럭 관계가 개선될 만 하면 영락없이 불편한 일들이 다시 생기는 거였다.
소위 시골수재인 김영웅씨는 애초부터 밤톨같이 단정한 서울내기 장필연씨가 영 마땅치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런 감정은 대학신입생환영회 때부터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 같다. 영웅씨가 수저를 들고 구수한 뽕짝을 부른 반면 필연씨는 당시 유행하던 팝송을 혀에 참기름 바른 듯 유창한 발음으로 불렀으니까.
그렇기는 해도 같은 학과인 두 사람은 그냥 저냥 어울려 대학 4년을 보냈다. 군 제대 후 영웅씨가 K사에, 필연씨는 T사에 각각 입사를 했고 그후 몇 년 동안은 서로가 바빠 간간이 동창회에서나 얼굴을 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동일 업종이다 보니 어쩌다 동창회에서 마주쳐도 자연 회사 일이 화제에 올랐다. 다행히 두 사람은 각자의 회사에서 전도 양양한 젊은 일군으로 일찍이 자리 매김을 한 터였다. 그러나 서로 실력이 엇비슷한데다가 회사자체도 경쟁관계에 있다보니 대화는 자연 아슬아슬하리만큼 서로의 자존심이 묵직하게 실렸다.
짜식,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아들만 둘을 둔 영웅씨가 딸만 둘을 둔 필연씨에게 절대 우위를 느끼는 건 바로 그에게는 없는 아들의 존재였다. 그러나 동창들이 모이기만 하면 필연씨는 딸 없는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며 미리부터 선수를 쳤다. 그래봤자 도복을 입은 아들놈이 힘차게 이단옆차기를 할 때 느끼는 뭉클함을 제 놈이 어찌 알랴.
그래도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같은 나라로 해외근무를 나가지 않았다면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뻐근하지는 않았을 게다. 게다가 서로 사활을 걸고 판촉경쟁을 벌여야 했으므로 둘의 입장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어차피 외국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 뻔했고 아이들 학교도 같다 보니 가족간의 잦은 접촉은 어떻게든 피할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엔 두 가족의 어울림은 완벽했다. 또래인 아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좋아 시시덕거리고 아내들은 교양 있고 다정하게 서로를 대했다. 문제는 가족들에게 유난히 곰살스런 필연씨 때문에 토종 한국남자인 영웅씨가 아내에게 번번이 지탄을 받는다는 거였다.
남자가 꼭 그래야만 가족을 사랑하는 거야?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아내의 넋두리를 참다못해 영웅씨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 요즘 세상에 당신 같은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요? 그집 아빠 십분의 일만큼만 나와 애들한테 해보라구요. 그의 아내 역시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귀국해 몇 년 동안은 서로간 만남이 뜸해졌다. 핑계야 국내 재 적응으로 바쁘다는 거였지만 실은 둘 다 은근한 신경전에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끼리는 꾸준히 연락을 하며 가까이 지낸 덕분에 두 집이 어울려 가끔은 스키여행도 갔다. 하지만 영웅씨와 필연씨는 이제 더 이상 회사얘기는 하지 않았다. 자칫 회사의 기밀이 유출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평생 서로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늙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훗날의 사정은 사뭇 그렇지 못했다. 어느 날 영웅씨의 아들과 필연씨의 딸이 돌연 결혼을 하겠다고 양쪽 부모에게 허락, 아니 통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영웅씨는 곧 유학을 떠날 아들을 일찍이 짝지어 줄 생각도 있었다. 게다가 미혜라면 어려서부터 줄곧 예쁘게 봐온 터라 굳이 말려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필연씨와 사돈이 된다는 사실인데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사정은 필연씨 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들 가졌다고 은근히 위세를 떠는 영웅씨가 고깝기는 했어도 정식은 꽤 괜찮은 신랑감인 게 사실이었다. 아버지를 닮아 소탈하면서도 제 앞가림은 제법 똑 부러지게 했으니까. 문제는 사돈이었다.
그러나 어쩌나, 기왕에 일이 이렇게 된 걸. 아무튼지 경사를 앞두고 쓸데없는 감정낭비는 말자는 게 양쪽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아들의 혼사를 불과 한 달 남짓 앞두고 영웅씨가 돌연 명퇴를 당하지만 않았다면 모든 게 그럭저럭 순조로웠을 터였다.
어쨌거나 오로지 회사를 위해 젊음을 바쳐온 영웅씨의 충격은 대단했다. 무엇보다 평생의 경쟁자이자 사돈인 필연씨에게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필연씨의 회사직원들로 북적북적한 신부측과 썰렁한 신랑측의 결혼식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그래도 아들을 가진 영웅씨는 비록 몇 달간이지만 며느리를 한 집에 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그로 인해 영웅씨는 필연씨에게 실추된 자존심을 다소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한편 졸지에 영웅씨 집에 딸을 넘겨준 필연씨의 심정은 참담했다. 퇴근해 돌아오면 딸 생각은 더 간절했다.
용렬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영웅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딸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필연씨가 좀 밉살스러웠다.
도대체 아버지가 매일 뭐라시니?
그냥 저녁 먹었냐고요. 며느리가 생글거리며 대답했다.
아직 우리집도 밥은 먹는다고 해라. 뾰족한 영웅씨의 말에 며느리는 금새 울상이 됐다.
웬 일이야? 바쁠 텐데. 오랜만에 자신을 불러낸 필연씨에게 영웅씨는 그렇게 말문을 텄다.
이제 바쁠 것도 없어. 나도 내일부터 출근 안 해. 영웅씨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필연씨는 급히 소주잔을 비웠다.
그나저나 친구로서 부탁 좀 하자. 네가 미혜에게 이 소식 좀 전해줄래? 안 그래도 명퇴한 시아버지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아이한테 차마 내 몫까지 보태기가 뭣해서... 자신의 옹졸함이 부끄러워 영웅씨 역시 급히 잔을 비웠다.
나중에 손자 봐주려면 힘이 있어야 하니까 앞으로 함께 운동이나 열심히 해두자. 말없이 소주만 축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처진 어깨를 툭툭 쳤다. 그날 밤 고름이 빠져나간 영웅씨와 필연씨의 가슴은 어느새 곱게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