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자 발표중 한사람인 ‘대부’의 감독 프랜시스 코폴라가 식장에 입장하기전 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돌풍·이변없는 ‘오스카 쇼’
‘반지의 제왕’시리즈 업적상 준 셈
젊은층등 겨냥 시청률 제고 성공
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이 작품상등 모두 11개 부문서 수상한 것은 아카데미가 ‘반지의 제왕’ 시리즈 종결편인 이 영화 한 편에 상을 주었다기보다 3편의 시리즈를 통틀어 시상한 것이라고 봐야 옳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감독상을 받은 뉴질랜드의 피터 잭슨이 수년간 심혈을 기울며 만든 것으로 1, 2편도 작품상 등 여러 부문에서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었지만 모두 4개의 기술상만 받는데 그쳤었다. 아카데미는 이번에 이 대담하고 상상력 풍부한 3편의 시리즈에 대해 일종의 업적상을 준 셈이다.
‘왕의 귀환’의 영광은 환상영화는 오스카 작품상을 받지 못 한다는 금기를 깼는데 과거 작품상 후보에 오르고도 쓴잔을 마신 환상영화들로는 ‘오즈의 마법사’와 ‘스타 워즈’및 ‘E.T.’등이 있다. 11개 부문 수상은 ‘벤-허‘와 ‘타이태닉’과 오스카 사상 최다수상 타이 기록인데 이 영화가 상을 휩쓸자 ‘야만인들의 침입’으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캐나다의 한 제작자는 수상 소감에서 “‘왕의 귀환’이 이 부문에 수상 후보에 오르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해 장내 폭소가 터져 나왔다.
4년만에 사회자로 돌아온 빌리 크리스탈의 유유자적한 진행과 재미있는 익살로 진행된 이번 오스카 쇼는 예년에 비해 훨씬 즐거웠다. 이번 오스카 쇼는 지난 수년간 시청자가 5,000만명 선에서 3,000만명 선으로 계속해 떨어지자 아카데미가 할리웃의 베테런 영화 제작자이자 감독인 조 로스에게 S.O.S.를 보내 제작을 맡게 됐다.
로스는 쇼를 안 보는 젊은 남자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잭 블랙, 벤 스틸러, 오웬 윌슨, 윌 퍼렐 등 이들 층에 인기 있는 코미디언들을 시상자로 내보내 쇼에 코미디 분위기를 많이 불어넣었다. 덕택에 시청률이 지난해보다 32%나 상승했다.
그러나 이번 시상식은 이변이 없는 지루하다시피 평범한 것이었다. 작품, 감독, 남녀 주조연 및 각본상 등이 모두 전문가들이 예측한 대로였는데 작은 이변이라면 ‘왕의 귀환’이 각색상을 받은 것. 이 상은 ‘미스틱 리버’와 ‘미국에서’가 경합을 벌일 것으로 예상들 했었다.
소피아 코폴라(32)가 각본상을 받음으로써 오스카 사상 한 집안 3대가 오스카상 수상자가 되는 두번째 기록을 올렸다. 소피아의 아버지 프랜시스는 ‘대부 II’로 감독 및 각본상을 그리고 할아버지 카마인은 음악상을 받았다.
소피아의 사촌인 니콜라스 케이지는 ‘라스 베이가스를 떠나며’로 주연상을 받은 바 있다. 3대가 오스카상을 수상한 처음 기록은 윌터 휴스턴과 존 휴스턴과 앤젤리카 휴스턴 등 휴스턴 가족이다.
생애 업적상을 받은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81)은 ‘핑크 팬서’ 시리즈와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을 만든 베테런으로 배우이자 가수인 줄리 앤드루스의 남편. 몹시 쇠약한 모습에 지팡이를 짚고 기자실에 나타났는데 한 기자가 재넷 잭슨의 수퍼보울 젖가슴 노출사건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내 아내도 영화에서 젖가슴을 노출했었다”면서 “TV 시리즈 ‘섹스와 도시’는 즐기면서 잭슨의 노출사건에 흥분하는 것은 위선”이라고 조소했다.
나는 이번 오스카 시상식에 참석해 ‘빈자리 메우는 사람들’의 하는 일을 처음 깨달았다. 이들은 시상식 도중 스타들이 화장실 이용 등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빈자리에 앉는 일을 한다. 그 일뿐 아니라 하오 5시30분에 오스카 쇼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부터 식장 밖에 깔린 레드 카펫을 밟고 남녀가 짝을 지어 오락가락 한다는 것을 이 날 처음 알았다.
쇼 시간이 다가오면서 진짜 스타들과 가짜 스타(?)들이 서로 섞여 기자와 카메라맨과 팬들 앞을 지나가는데 알고 나서 그런지 배지를 단 가짜 스타들의 ‘연기’가 어색해 보였다.
이날 남우주연상을 받은 션 펜도 조롱했듯이 오스카 쇼는 여배우들의 패션 쇼도 겸한다. 식 전 극장 밖 기자석에 앉은 기자들에게 나눠 준 전단을 보니 르네 젤웨이거(조연상 수상)가 치장한 카르티에 다이아몬드에 대한 내역이었다. 할리웃이 허위와 허영의 도시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한국영화도 이젠 손색없다
실미도 특공대원 설경구와 정재영(왼쪽)이 유흥으로 권투를 하고 있다.
‘태극기…’‘사마리아’등 대거 출품
수작‘실미도’상영 끝나자 박수갈채
지난 2월25일부터 3월3일까지 샌타모니카에서 열린 아메리칸 필름마켓(AFM)에 참석했다. AFM은 전 세계에서 출품된 영화를 구매자들이 관람 후 매매협상을 하는 구매자 위주의 시장이어서 나는 그동안 참석치 않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20편에 가까운 한국영화가 출품된 데다 특히 지금 한국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실미도’와 ‘태극기를 휘날리며’와 함께 얼마 전 끝난 베를린 영화제서 최우수 감독상을 받은 김기덕의 ‘사마리아’가 출품돼 참석했다.
AFM은 기자증이 있어도 배급사측의 허락을 받아야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나는 사전에 ‘태극기’(수출용 제목)에 대한 해외 수입사들의 관심이 크다는 한국 신문기사를 읽은 터라 영화 상영 하루전 날 배급사인 쇼박스측에 몇 차례 전화를 걸어 표 한 장을 부탁했다. 쇼박스측은 “수입사들의 관람 요청이 쇄도, 자리가 없을 것 같다”며 “상영 극장에 와서 기다렸다 빈자리가 있으면 관람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계속 관람이 불가능 할 것 같다는 말을 강조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영화가 아무리 인기가 있더라도 구매자들로 극장이 만원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는 ‘태극기’에 대한 수입사의 관심도 알아보고 또 꼭 영화를 봐야겠다는 마음에서 상영극장인 모니카를 찾아갔다. 극장 좌석의 3분의2 이상이 찼지만 만원은 아니었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든 강제규(‘쉬리’) 필름의 최 사장의 배려로 입장했다.
‘태극기’는 한국 영화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의 특수효과를 자랑하는 대하 전쟁액션 멜로물이다. 끊임없는 전쟁액션과 이 전쟁에 참전한 두 형제의 사랑과 갈등이라는 한국 영화 특유의 멜로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했다. 수준급 영화지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의 모방작 같았다. 연기와 인물의 성격 개발이 약한 것 외에도 이 영화의 큰 결점은 전쟁액션 외에 쓸데없이 개인과 개인 또 집단간의 폭력이 과다하다는 것. 깡패영화 보는 것 같은데 액션을 위한 액션 폭력영화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2시간이 훨씬 넘는 상영시간도 너무 길다. 외국인들에게 어필할지 미지수다.
이에 비하면 한국판 ‘더티 더즌’ 같은 ‘실미도’가 훨씬 낫다. ‘공공의 적’을 만든 강우석 감독의 이 영화도 관객이 많았는데 구매자들보다 한국 관객이 더 많았다. 연기파들인 안성기와 설경구 외에도 출연진들의 연기가 좋고 인물 묘사도 잘 됐다. 액션도 박진하고 구성도 꽉 짜여진 수작으로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이것도 역시 상영시간이 긴 것이 흠.
이 영화의 해외시장 진출 가능성의 걸림돌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내용이 외국인들에게는 너무 생소할 것이라는 점. 나와 영화를 함께 본 LA 영화비평가협회 동료 회원 해리엣과 그의 남편 샘은 영화가 끝나고 내용이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한 일본계 미국인 수입자도 내용을 파악치 못하겠다는 관람평. 게다가 영화 처음에 실미도 사건 내용을 알리는 한국어 자막을 영어로 번역 안해 이런 혼란이 더 커진 것 같다.
김기덕의 ‘사마리아’는 김 감독의 특징이 잘 나타난 영화. 인간의 어두운 면을 유난히 파고드는 그는 이번에도 원조교제라는 명제를 내걸고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얘기하고 있지만 늘 그렇듯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비판을 절제하고 있다. 생략하듯이 만든 이 영화에서는 종교적 메시지가 강조되고 있는데 고교생 딸의 원조교제를 알게된 형사 아버지(이얼의 착 가라앉은 연기가 좋다)의 고뇌와 복수를 통해 용서와 속죄를 얘기했다. 그의 다른 영화와 달리 노골적 섹스 신이나 끔찍한 장면이 없긴 하지만 그의 영화는 언제 불쑥 어둡고 참혹하고 또 엽기적인 장면이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하다. 나는 김 감독을 토론토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매우 감정적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이밖에도 그런 대로 즐거운 코미디 ‘그녀를 믿지 마’를 봤는데 이 것 역시 상영시간이 길다. AFM에서 한국영화를 본 뒤 느낀 점은 우리나라 영화가 이젠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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