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국의 무역수지적자 규모는 4,894억 달러, 조지 부시 행정부가 의회에 제출한 2005년 예산안의 재정적자 규모는 5,200억 달러. 미국의 쌍둥이 적자 규모를 대략 합치면 연간 1조 달러에 이른다.
이는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의 10%, 한국 GDP의 두 배에 해당한다. 외환위기 직전인 96년 한국의 무역적자가 200억 달러였던 점을 감안하면 미국 경제는 크게 흔들릴 법도 하다. 하지만 미국 경제는 워싱턴 정가의 의원들, 뉴욕 월가의 이코노미스트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재정 및 무역 적자로 인해 동요하지 않고 있다. 적자가 늘어나는데도 미국 국채(TB) 금리는 내려가고 달러가 하락하는데도 수입이 줄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미국이 국제금융시장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무역적자는 달러의 지배력으로 해소되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이 수천 억 달러의 외환을 쌓아두고 있는 것과 달리 미국의 외환보유액은 800억 달러에 불과하다.
달러가 국제 기축통화이고, 무역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미국의 최대 수출품은 달러다. 미국 이외에 유통되는 달러는 미국 내에 돌아다니는 달러보다 두 배나 많다. 외국은 달러를 벌기 위해 땀흘려 일하는데 미국은 돈을 찍어 외국 물건을 산다. 45센트의 인쇄비로 100달러 짜리 달러 한 장을 찍어내면 일제 디지털 카메라, 중국산 장난감을 얻을 수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미국의 무역적자는 전 세계의 달러화에 의해 완충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12개 국가의 단일 통화인 유로가 99년에 등장하면서 달러의 위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각 국 중앙은행의 달러 보유량이 더 늘어나고 달러의 지위가 오히려 강화되는 경향이다.
재정적자는 아시아 국가들이 도와주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무역흑자로 번 돈으로 TB를 대거 사들이고 있다. 미국 정부는 장당 1달러 미만의 비용으로 100만 달러 짜리 TB를 찍어 아시아 중앙은행과 기업들에 팔고 그 돈으로 재정적자를 메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땀흘려 돈을 벌어 미국의 전쟁 비용을 대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말에 일본이 TB 최대 구매자였고 최근 들어 중국이 일본에 버금가고 있다.
요즘 들어 아시아 국가들이 통화 방어를 위해 TB 구매량을 늘리고 있다. 달러가 하락하면 미국으로 들어오는 자금 유입량이 줄어야 하는데, 거꾸로 아시아 국가들이 달러 표시채권인 TB를 사서 미국의 시장 금리를 떨어뜨리고 재정적자를 보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월가에서는 미국이 중국과 일본에 통상압력을 가하면 두 나라가 보복 조치로 TB를 대량매각, 미국 금융시장을 교란시킬 것이라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돌고 있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전쟁에 준하는 경제 보복을 단행하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풍부한 자금력이 아시아 국가의 TB 투매를 저지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극단적으로 중국과 일본이 TB를 한꺼번에 팔아버린다면 오히려 큰 손해를 본다. 달러가 유입되기 때문에 위안화는 고정환율제를 풀어 절상해야 하고 엔화도 올라 무역에 손해를 본다. 미국이 흔들리는 것보다 더 큰 동요가 중국과 일본에 일어나게 된다. 98년 아시아 위기 직후에는 국제자금이 안전한 미국으로 몰려 TB가 인기였고 지금은 아시아 국가들이 통화 방어를 위해 TB를 매입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규모가 크고 세계 경제를 리드한다고 해도 두 적자가 무한정 불어날 수는 없다. 재정 적자가 늘어나면 미국 정부는 국채를 더 찍어내야 하고 그러면 금리가 상승하게 된다. 또 언제까지 외국 정부에 의존해서 재정을 메울 수 없는 여건이다. 무역적자도 이미 위험수위인 GDP의 5%를 넘어섰다. 달러를 마구 찍어 무역적자를 해소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국제금융시장 지배력을 통해 버텨냈지만, 앞으로 1~2년 내에 쌍둥이 적자가 미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이제 이 두 모순을 해결하지 않을 경우 성장 잠재력을 잃을 단계에 임박해 있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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