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십자가 처형을 하루 앞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오른쪽서 두번째)가 제자들과 얘기하고 있다.
피범벅 예수 처형장면 ‘섬뜩’
세상에서의 마지막 12시간
구타·채찍질등 고난의 연속
과도 폭력 비판속 전율적 감동
처참하도록 아름답고 감정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역겨울 정도로 폭력적이요 유혈 낭자한 작품이다. 기독교 신자이든 아니든 눈물과 고통 그리고 감동 없이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 감독(공동각본)은 자신의 메시지와 비전 전달에 상당히 성공했다고 하겠다.
깁슨은 영화의 원전이 된 요한 복음 등 4개의 복음서의 내용에 충실하기 위해 지금은 사어가 된 아람어(예수 시절 유대인이 쓰던 언어)와 라틴어를 사용(영어 자막)하면서 예수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12시간을 자세히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영화에 비하면 과거에 나온 많은 예수 영화는 피와 살이 없는 만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저렇게 고문과 온갖 육체적 형벌을 당하면서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예수가 액션 영화의 주인공을 연상케 한다) 하고 의문할 정도로 과도한 폭력. 차마 눈을 뜨고 보기가 힘들 지경으로 잔인하고 무자비해 정작 예수의 정신을 보여주려는 진정한 감독의 의도마저 흐리게 만들고 있다. 궁극적으로 예수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용서를 깨닫게 되면서도 그런 결론을 위한 수단인 폭력의 과다함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만월이 뜬 한 밤 안개가 자욱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짐 캐비즐-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의 모습과 연기가 훌륭하다)가 등을 돌리고 서서 곧 자기에게 닥칠 고통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달라고 하느님에게 호소하면서 고뇌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칼렙 데샤넬의 촬영과 존 데브니의 귀신들의 모듬음 같은 음악이 효과적이다). 이때 검은 망토를 입은 악마가 나타나 예수를 조소한다(악마는 영화 내내 가끔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깁슨은 처음부터 영화의 초점을 예수의 고통에 맞추고 있다(그 초점 열이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을 정도).
예수는 유대인 대제사장 가야바가 보낸 군대에 의해 체포돼 가야바와 바리새인들 앞에서 심문을 받는데 이들은 예수를 빌라도 총독 앞으로 끌고 가 십자가 처형을 요구한다.
예수를 죽여야 할 이유를 발견치 못한 빌라도는 군대에게 가혹한 체형을 내리라고 지시한다. 이미 이전에 유대인들에 의해 죽도록 구타당한 예수에 대한 체형이 시작된다. 채찍질에 온몸이 시뻘건 상처투성이가 된 예수에게 이번에는 끈에 쇠갈고리가 달린 여러 갈래로 된 채찍으로 예수의 등과 가슴과 다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면서 피가 때리는 자의 얼굴에 튀고 예수는 고통을 못 이겨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른다(이 장면이 15분 정도 계속되는데 심장 약한 사람은 못 볼 정도로 끔찍하다).
이어 예수는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면서 다시 무참한 채찍질과 구타를 당한 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힌다. 예수의 손에 못이 박히는 장면이 전율할 정도로 극사실적인데 예수의 골고다까지의 고통과 그가 숨을 거두기 전 십자가 위에서의 고통이 35분 정도 진행되는데 보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예수가 숨을 거둔 후 높은 하늘에서 십자가를 향해 수직으로 하나님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지진이 일어난다. 영화는 예수가 부활해 무덤 밖으로 걸어나가는 짧은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난다.
예수의 수난과 고통은 그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 의해 다소 경감된다. 유다의 배신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장면과 최후의 만찬 등. 그 중에서도 가장 상냥한 것은 목수 일을 하는 예수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마이아 모건스턴)의 다정한 장면. 슬로 모션과 클로스 없이 유난히 많다. R. Newmarket. 전지역.
예수의 고통에 바치는 ‘눈물의 통곡’
어제 풀러튼에 사는 이씨라는 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자신을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소개하고 멜 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이 볼만한 영화냐고 물었다. 그는 유례 없이 LA타임스가 1면에 쓴 영화평을 읽고 이같은 질문을 해 온 것인데 타임스의 케네스 투란은 ‘좁은 비전과 가공할 폭력의 영화’라고 혹평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씨에게 관람을 권했다. 과도한 유혈 폭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인데 특히 기독교 신자이니 꼭 관람하라고 권했다(등급은 17세 미만 관람시 부모나 성인 동반이 필요한 R).
깁슨의 아이콘(Icon)사가 제작, 오늘부터 전미 2,800개 스크린에서 동시 개봉되는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과다한 폭력과 반유대인 감정 조장 우려 때문에 큰 논란의 대상이 됐었다. 투란도 바로 이 두 가지 명제를 내세워 반대의견을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영화 내용에 관해 일부 유보사항은 있지만 ‘엄지손가락 아주 높이’라며 찬성한 비평가 로저 이버트처럼 영화 관람을 적극 권한다.
우선 반유대인 감정 조장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같은 주장은 완전히 영화의 본질을 잘못 판단한 넌센스이다. 영화에서 일부 유대인들이 예수 처형을 원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지만 그것은 성경에 있는 사실. 영화를 보고 깁슨이 자비 3,000만달러를 들여 반유대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나무를 보고 숲은 못 보는 안목이다.
이 문제보다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사항은 폭력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깁슨을 새디스트라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참혹해야 하는가 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제작 의도마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느낀 점은 깁슨이야말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어느 날 영혼의 파산을 깨닫고 그 파산에서 자기를 구해 주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예수에 대한 깊은 사랑 없이는 이 같은 영화가 나올 수가 없다. 깁슨이 예수의 고통에 바치는 눈물의 통곡이라고 느꼈다. 깁슨은 모든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으로 보고 설교로 듣기만 하던 예수의 고통을 직접 경험하면서 속죄와 감사의 눈물을 흘리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화면 속의 예수의 고통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처절해 나는 영화 내내 숨쉬기가 힘든 긴장감 속에 잠겼었다. 영화가 끝나고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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