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지지자가 19일 오후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에서 반대자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다.
<현장 르포>
결혼이 뭡니까? 신랑과 신부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신랑과 신랑이 결혼하고 신부와 신부가 결혼한다? 이건 자연법칙를 파괴하는 짓입니다. 환상이라고요 환상.
손바닥만한 성경책을 왼손에 치켜든 40대 사나이가 열변을 토하자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끌고나온 개와 함께 다가서며 맞고함을 쳤다.
환상이라니, 이것 보세요. 이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요. 아니, 당신이야말로 그놈의 환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걸 즐기는 것 아니에요?
19일 오후 2시20분쯤, 샌프란시스코 시청앞. 개빈 뉴섬 시장의 동성애자 결혼증명서 발급결정 이후 미국은 물론 세계적 뉴스의 초점이 된 그곳은 한마디로 북새통이었다. 정문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늘어선 150여명과 온갖 격렬한 구호가 적힌 깃발을 치켜든 오른쪽 너댓명의 설전이 꼬리를 물었다.
40도를 밑도는 쌀쌀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였다. 시청 앞길 맞은편 공원에도 행인이나 관광객 수십명이 걸음을 멈춘 채 혹은 귀를 쫑긋 세우고 혹은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아예 길 한 가운데 멈춰세우고 창문을 내린 채 계단앞 설전에 빠져있다 뒷차의 경적소리에 놀라 내키지 않는 듯 엉금엉금 현장을 떠나는 운전자들도 수두룩했다. 취재진은 취재진대로,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해 인파 틈새를 오가는 경찰들의 발걸음도 분주했다.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은 계단위에서 정문을 등진 채 서 있는 정복 차림의 경찰관 한명뿐이었다.
성경책을 든 남자와 개를 끌고나온 여자의 말다툼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경찰관 서너명이 얼른 ‘인의 장막’을 친데다 때마침 정문을 열고 계단쪽으로 걸어나오는 여자커플에게 모든이의 눈길이 쏠려버린 때문이었다. 왼쪽 사람들의 박수섞인 함성과 오른쪽 사람들의 저주섞인 야유가 터져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그러나 둘의 표정은 여유만만 행복가득이었다. 눈을 부라리고 야유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보란듯이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진한 키스까지 나누고는 마중나온 사람들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성경책을 든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열변은 토해냈다. 그는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즈에서 이 못된 소식을 듣고 LA의 동지들과 함께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로버트 브로드(44)라는 사람이었다. 인간이 자연에 반항하면 자연은 반드시 인간에게 보복을 합니다. 그런데 동성애라니, 동성애자에게 결혼증명서를 준다니, 뭐하는 짓들입니까. 맙소사, 지금 지옥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때 깃발을 든 ‘LA동료들’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도록 깃발을 더욱 가까이 들이댔다. 사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리라는 등 동성애 반대구호들이 적힌 깃발들이었다. No Same Sex, No Same Sex Marrige. Shame on America!(동성애 반대, 동성애 결혼 반대. 미국의 수치여!라고 쓴 트럭 한 대가 시청앞을 천천히 지나가며 장단을 맞췄다. 그러나 동성애 지지자들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동등결혼’ 소속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부지런히 인파를 헤치고다니며 우리 모두는 결혼의 자유를!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나눠줬다. 중국계 앤디 왕(23)은 우리 단체는 국적이나 인종 등 백그라운드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수는 없지만 코리안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귀띔하며 기자에게 스티커를 건네주기도 했다.
3시20분쯤. 아슬아슬 유지된던 분위기가 아연 험악해졌다. 아기를 안은 중년 남자가 갑자기 깃발부대 앞으로 바싹 다가서며 거칠게 항의한 것. 경찰들이 황급히 막아서면서 간신히 위기를 넘기는가 싶더니 환호와 야유로 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또 한쌍의 여자커플-. ‘신랑같은 여자’가 결혼증명서가 담긴 노란봉투를 흔들고 ‘신부같은 여자’는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례했다. 팔짱을 낀 새 신랑신부가 계단 아래까지 내려서기도 전에 취재진이 달려들었다.
소감이요? 정말 정말 행복해요. 꿈만 같아요.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10동안 살아온 우리가 오늘 시정부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았는데 기쁘다는 말밖에…. 어려운 결단을 내려준 개빈 뉴섬 시장께도 감사를 드리고요.
’신부’ 에리카 크레이븐(33)이 말을 잇는 동안 어디선가 걸려온 축하전화를 받으며 탱큐를 연발하던 신랑은 데비 그린(32)은 바로 옆 반대자들에 대해 점잖게 한마디했다.
나는 표현의 자유를 믿습니다. 우리가 찬성한다고 할 수 있듯이 저 사람들도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에 대한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크다 해도 우리들이 쌓아온 사랑보다는 못할 겁니다.
인터뷰를 마친 둘은 3월에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밝힌 뒤 다시금 노란봉투를 흔들며 총총 걸음으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새 부부’가 시청을 나올 때마다 이렇게 중단되기를 거듭하며 설전은 계속됐다. 오후 4시쯤. 이번에는 머리칼과 눈썹이 유난히 검은 건장한 남자커플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깃발부대의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옆에서 어깨동무를 하며 포즈를 취해주기까지 했다. 샌디에고에 사는 이란계인 이들 부부는 동거 7년째로 신랑은 의사(파르지안), 신부는 의대생(바바크)이었다.
이걸(결혼증명서) 받으려고 오늘 새벽에 비행기로 날아왔지요. 받고나니 정말 후련하고 행복합니다. 내(신부 바바크)가 반체제로 찍혀서 이란에는 못가지만 대신 스페인 등 유럽으로 5월쯤 신혼여행을 갈 예정입니다.
샌디에고로 돌아갈 비행기를 타야 한다며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들 뒤로 다시 고함 소리가 울려펴졌다. No Same Sex! No Same…
<김판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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