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미주본사 논설위원>
얼마 전 저녁 모임에서 한 남자 후배가 아내로부터 들은 ‘느닷없는 질문’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아내가 갑자기 “당신,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던져서 몹시 당황했다는 말이었다.
40대 초반의 그는 객관적으로 투명도 높은 성실한 남편이지만 너무 점잖아서 곰살궂게 ‘사랑’ 운운할 타입은 아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딴 마음’을 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워낙 애정 표시가 없어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런 걸 꼭 말로 표현해야 아나? 간지러워서 그런 말은 못한다. 솔직히 그런 걸 표현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 우리가 보고자란 문화가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결혼 기념일이나 어머니 생일이라고 뭘 챙기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무덤덤함을 ‘성장 환경’ 탓으로 돌렸다.
“당신,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두고 보자면 세상의 모든 아내(혹은 남편)는 세 부류로 나뉜다. 사랑 표현이 넘쳐서 질문이 필요 없는 부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사랑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도무지 표현이 없어서 질문을 하게 되는 부류, 그리고 부부사이가 너무 나빠서 그런 질문은 가당치도 않은 부류.
별 문제 없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한인 부부들은 대개 두 번째 부류에 해당될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휘발성으로 끓어오르던 애정 입자들이 결혼 10년, 20년 지나면서 차츰 의식의 밑바닥으로 착 가라앉아 바위처럼 굳어지면서, 지금은 그저 정, 혹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안정된’ 관계들이다.
남성에게 아내란 어떤 존재일까. 베이컨의 말을 빌리면 “젊은 사람에게는 연인, 중년에게는 반려자, 노인에게는 간호인”이다.
아내들이 애정 표현을 문제로 삼는 시기는 주로 반려자 시기이다. 연인 시절에 ‘표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날까 봐 누르고 눌러도 터져 나오고, 마음속에 가두어 두고 싶어도 속수무책으로 넘쳐흐르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싶은 절박함은 애정표현을 쑥스러워 하는 어떤 문화나 성격도 넘어선다.
자녀가 생기면서 부부는 ‘연인’에서 ‘동업자’ 관계가 된다. 가정이라는 비즈니스를 같이 운영해 가는 파트너이다. ‘생계’가 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애정’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인데 그 과정에서 대개 남성들은 별 문제가 없지만 여성들은 뭔가 상실감을 느낀다.
남성은 성취·출세에 가치를 두는 반면 여성은 사랑 혹은 관계를 중시하는 성향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결혼생활에서 여성들이 갖는 ‘손해보는 느낌’과 상관이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비혼모(非婚母)라는 말이 생겼다.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엄마가 된다는 점에서는 미혼모와 같지만 애초에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자의식 강한 고학력 여성들 사이에서 아이만 갖고 누구의 아내는 되지 않겠다는 비혼모가 등장하고 있다. 그들이 독신을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결혼하면 여자만 손해본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한다.
신세대 여성들 사이에서 연하의 애인이 유행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연하의 남성은 “쓸데없는 권위의식이 없고, 가부장적 문화에 젖지 않아서 동등할 수 있다”는 것이 좋은 점으로 꼽힌다.
맞벌이를 해도 육아·가사는 여성이 도맡는 불공평함, 1세 남성들의 어쩔 수 없는 가부장적 사고방식 등으로 여성들은 종종 손해보는 듯한 느낌에 빠지고 “이 남자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회의에 젖게 된다. 그럴 때 나오는 질문이 “당신, 나 사랑해?”가 아닐까.
꿈쩍도 않을 것 같은 무쇠도 갈라지는 시점이 있다. 외부의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재료가 피로해져서 마침내 파괴되는 현상을 피로파괴라고 한다. 이때 금속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한계가 피로한도 혹은 내구한도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피로한도가 있다. 보살피고 가꾸는 노력이 없으면 한때 죽도록 사랑하던 관계도 무너질 수가 있다. ‘사랑한다’는 말, 사랑의 표현만이 누적된 관계의 피로를 씻어낸다. 밸런타인스 데이를 그런 날로 삼았으면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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