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1년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는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웅장한 자금성을 완공한 뒤 곧바로 환관 출신 측근 대신 정화에게 해양 원정을 명령한다. 영락제는 몽골제국 원나라를 고비 사막 북쪽으로 몰아내 중국 통치에 성공하지만, 조카 건문제를 쫓아내고 황제가 되었다는 컴플렉스에 시달렸다.
삼촌의 반란에 퇴위한 건문제는 바다 건너 어디론가 도망갔다는 소문이 들렸고, 이에 영락제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 조카를 죽이라는 명령을 정화에게 내렸다. 이에 정화는 10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말레카 해협과 인도, 페르시아, 아프리카 마다카스카르 섬까지 원정한다. 정화 함대의 남해 원정은 대륙에 이어 해양 제국으로 세를 확대, 정복지의 오랑캐로부터 조공체제를 부활시키려는 목적도 함께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 공식적으로 확인되고 인정되는 중국 명나라 역사의 일부분이다.
영국 해군 제독 출신 개빈 멘지스는 컬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1492년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에서 대서양 서쪽에 큰 섬이 그려진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역사적 사료와 현지 답사를 거쳐 중국 명나라의 정화 함대가 컬럼버스에 앞서 70년 전에 미국을 발견했고, 쿠크 선장보다 300년 전에 중국이 뉴질랜드에 2만여명이 거주하는 식민 정착촌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120개국을 방문, 900개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실증 자료를 뒤져 도출한 결론은 가히 놀랍다. 정화의 부하 장군들이 함대를 나눠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마젤란에 앞서 세계 일주를 했으며 남극과 그린랜드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1421년:중국이 미국을 발견한 해’라는 책을 2년 전에 발간했다. 멘지스의 새로운 주장이 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 각지에서 유럽인들에 앞서 중국인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되고, 세계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은 1992년 컬럼버스에 의한 미주 발견 500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했고, 매년 10월12일을 컬럼버스 데이로 지정, 휴일로 삼고 있다. 만일 정화 함대의 미국 발견 사실이 확인된다면 미국의 역사는 물론 가치관에 큰 혼란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멘지스의 주장은 역사학계의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중국 원정대가 돌아왔을 때 명나라가 다시 고립주의로 돌아섰고 정화가 실각했기 때문에 결정적인 사료들이 소각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증거는 편린에 불과해 역사를 뒤바꾸기에는 역부족이다.
중국인이 컬럼버스보다 미국을 먼저 발견했는지 여부는 역사학자에 맡길 일이다. 분명한 것은 명의 영락제는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보다 일찍이 전 세계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이다. 중국이 거대한 해상제국을 형성했을 때 유럽은 봉건시대의 암흑에 가려 있었고 문명 발상지 이집트와 중동은 투르크 제국의 억압에 묶여 있었다.
미주 대륙을 발견한 사람이 유럽인인지, 중국인인지의 논쟁에서 한발 떨어져 우리는 과거 500여년의 역사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영락제 이후의 명 황제들은 함대를 정박지에 방치하고 자금성에 숨어버렸다.
중국이 대양을 포기하고 중원에 고착해 있을 때 유럽 국가들은 해상으로 진출, 신대륙을 식민화 하고 봉건제도의 미몽에서 깨어나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전 세계 제해권은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프랑스-영국의 순서로 넘어갔고 영국은 200년 동안 ‘해가 지지 않는 해상 제국’을 건설했다. 2차 대전 후 세계의 주도권을 이어받은 미국도 역시 유럽인의 후손들이 건설한 나라다.
이제 중국이 500년의 잠에서 깨어나 용트림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년 동안 연간 10%의 고도성장을 달성했고 지난 3년 미국 경제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도 과열이 우려될 정도로 발전했다. 미래학자들은 머지 않아 중국이 미국의 경쟁자로 부상하고 언젠가 중국의 세기가 올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을 발견했다는 멘지스의 새로운 시각은 사실 여부를 떠나 미국 주도의 세계에 새로운 강자로 부상할 중국의 역사적 저력을 일깨우고 있다.
김인영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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